주말 오후, 리모컨을 쥐고 뭘 볼지 한참 채널을 넘기다 멈춘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날 치킨 상자를 뜯으면서 오래 묵혀두었던 영화 하나를 꺼냈습니다. 경찰대생 둘이 무면허로 사건을 쫓는다는 설정에 처음엔 '뻔하겠지' 싶었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니 상자 안에는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영화 , 뒤늦게 본 게 조금 억울해진 작품입니다.박서준과 강하늘, 온도차가 만든 케미버디무비(buddy movi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격이나 배경이 판이하게 다른 두 인물이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구조인데, 이 공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캐스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 그 공식을 교과서처럼 따릅니다. 미혼모 어머니를 위해 경찰대에 입학한 박기준(박서준)은 앞뒤 재지 않고 몸부터 던지..
개봉 당시 관객 670만 명을 동원했던 영화 한 편을 십수 년 만에 다시 꺼냈습니다. 냄비에서 튀김만두가 데워지는 냄새가 거실을 채울 즈음이었는데, 화면이 뜨자마자 리모컨을 내려놓은 손이 끝내 다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2008년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통하는 이유를, 다시 보고 나서야 조금 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캐릭터 — 세 결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방식영화의 구심점은 단연 세 배우가 만들어내는 앙상블(ensemble)입니다. 앙상블이란 개별 연기자가 아닌 복수의 배우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호흡을 맞추는 집단 연기 방식을 뜻합니다.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을 연기한 정우성은 말을 극도로 아끼는 대신 총구 하나로 의사를 표현하고, 마적단 두목 박창이의 이병헌은 웃음기 사이로 서늘한 열..
성공 확률 3.48%. 영화 이 내세운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장치로 읽혔습니다. 그런데 막상 화면 앞에 앉으니 그 숫자가 몸으로 먼저 왔습니다. 개봉 한참 지난 뒤 조용한 밤 OTT를 켰을 때, 이불을 끌어안은 두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던 그 감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배우 케미 — 장갑차 안에서 만들어진 것재난 영화는 보통 스케일로 승부한다고들 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에서 눈을 붙들어둔 건 무너지는 도심이 아니라, 좁은 장갑차 안에서 하정우와 이병헌이 주고받는 호흡이었습니다. 스피커를 타고 방바닥까지 전해지던 저음보다, 두 배우가 대사를 치고받는 리듬에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이 장면들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 신기해집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찍은 게 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865만 명을 돌파한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숫자보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저녁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거실에 어묵탕 냄새가 은은하게 깔리던 그날 밤, 국자를 든 손이 화면 앞에서 멈춰버렸고, 식탁 위 그릇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코미디라기엔 뭔가 더 있었던 영화, 수상한 그녀입니다.두 배우, 한 인물: 캐릭터 분석이 먼저다수상한 그녀를 이해하려면 캐릭터 설계부터 짚어야 합니다. 칠순 할머니 오말순은 나문희와 심은경, 두 배우가 나눠 맡는 구조입니다. 이걸 업계에서는 듀얼 캐스팅(Dual Casting)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듀얼 캐스팅이란 동일 인물을 시간대나 상황에 따라 두 배우가 분담해 연기하는 방식으로, 단순한 회상 장면 ..
2005년 개봉한 왕의 남자는 관객 1,230만 명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숫자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직접 극장에서 마주한 뒤로는 납득이 됐습니다. 단순히 볼거리가 풍성한 사극이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결이 살아 숨 쉬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연기력 — 대사 없이도 전달되는 것들콜라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걸 잊었습니다.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 방금까지 아이처럼 웃다가 다음 컷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일입니다.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 있던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고, 무릎 위 팝콘 통엔 그 이후로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이 장면에서 정진영이 구사한 것은 내면 연기(internal acting)에 가깝습니다. 내면 연기란..
스튜디오 지브리가 1986년 첫 번째 극장판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거실 스피커에서 도라호의 포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몸이 반응했습니다. 오래된 명작이라는 말이 때로 얼마나 실감 없이 쓰이는지, 이 영화 앞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성우진 — 목소리만으로 캐릭터를 완성한다는 것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성우진은 화면을 보조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라퓨타를 보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파즈를 연기한 타나카 마유미의 목소리는 소년 특유의 패기와 불안감을 동시에 얹고 있어서, 화면을 안 봐도 그 아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성우(聲優), 즉 목소리 배우라는 직군은 표정이나 몸짓 없이 오직 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