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 불을 다 끄고 모니터 하나만 켜둔 채로 튼 밤이었습니다. 2021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외교관들이 함께 탈출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처음엔 그냥 액션 영화겠거니 했는데, 두 시간 내내 방 안의 정적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쯤엔 몸에 힘이 다 빠져 있었습니다.어두운 방에서 만난 얼굴들 — 배우 앙상블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타 배우 두 명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면 보통 한 명이 화면을 압도하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소비되기 마련인데, 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화면 안에 있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무게를 지고 움직인다는 느낌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됐습니다.한신성 대사 역의 김윤석은 앙상블 연기(ensemble acting),..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영화를 보다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올빼미를 보던 그날 밤, 뻗었던 손을 소현세자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그대로 허공에 멈췄습니다. 조선 궁중의 어둠을 주맹증이라는 낯선 설정 하나로 서스펜스 엔진 삼은 이 영화, 류준열과 유해진의 신체 연기가 얼마나 무섭게 맞물리는지 직접 겪어보니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주맹증 설정, 서스펜스의 출발점영화를 보기 전에 '주맹증'이라는 단어를 미리 찾아봤습니다. 주맹증(晝盲症)이란 밝은 환경에서는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어두운 환경에서 오히려 사물 윤곽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 장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눈입니다. 영화 속 경수는 이 조건을 궁궐 안에서 철저히 숨기며 살아가..
김혜수와 염정아, 두 배우가 동시에 화면을 채우는 장면만으로 이미 본전을 뽑는 영화입니다. 처음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켰을 때, 솔직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배우들의 존재감이 서사보다 먼저 말을 거는 영화, 밀수입니다.캐스팅만으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영화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스팅이란 주연 한 명이 이야기를 이끌기보다 여러 배우가 각자의 무게로 화면을 함께 채워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밀수는 이 앙상블 캐스팅의 교과서에 가까웠습니다.김혜수가 조처자로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등줄기가 반응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고,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이 사람이 판을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화면 ..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 개봉 당시 역대 흥행 3위를 기록했습니다. 처음엔 그 수치가 잘 와닿지 않았는데, 아이들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번갈아 넣다가 어느 순간 다들 말을 잃는 걸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닿았는지를요.재난 표현 — 스펙터클이 아닌 애도의 방식재난 영화라고 하면 흔히 폭발과 붕괴 장면을 볼거리로 내세운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비슷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이 영화는 그 공식과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무너진 온천 마을이나 버려진 유원지 같은 폐허 공간에 카메라를 오래 세워둡니다. 여기서 이 연출 방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둔 서재에서 쿠팡플레이 재생 목록을 뒤적이다가, 강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에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청부 살인을 완벽한 사고사로 둔갑시키는 설계자의 이야기는, 그날 밤 제 휴대폰을 뒤집어 놓게 만든 영화였습니다.강동원과 이무생, 눈빛으로 서사를 끌고 가다영화 첫 장면부터 느낌이 달랐습니다. 주인공 영일이 신호 체계와 사람들의 동선을 계산해 사고를 설계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무릎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을 뒤집어 놨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아챘습니다. 강동원이 택한 연기 방식은 제가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그는 표정을 거의 바꾸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 접근법은 미니멀리즘 연기(minimalism acting)라고 부를 수 있는데, 쉽게..
거실 불을 끄고 쿠팡플레이를 켰을 때만 해도 그냥 가볍게 한 편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바우 역 마동석의 첫 타격음이 스피커를 타고 넘어오는 순간, 소파 등받이를 짚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습니다. 오컬트와 액션을 한 화면에 버무린 이 영화가 기대 이상이었던 이유,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마동석이라는 배경, 그리고 이 영화가 선택한 세계관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마동석 영화라고 하면 으레 넓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스케일 큰 난투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는 오히려 좁고 어두운 골목과 밀폐된 실내를 주무대로 씁니다. 화려한 무술 퍼포먼스 대신 묵직하게 내리 꽂히는 타격 한 방으로 서사를 밀고 가는 방식인데,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이 영화만의 질감을 만들어냅니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