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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분짜리 영화 앞에서 망설인 적이 있습니다. 특별관도 아니고 동네 2D 상영관이었는데, 티켓을 끊고 나서도 "이 러닝타임을 버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뜰 때 시간을 잊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는 스펙터클로 시작해서 두 사람의 눈빛으로 끝나는 영화였습니다.
배우 앙상블 — 낯익은 얼굴들이 만들어낸 낯선 깊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신뢰하는 배우를 반복해서 기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번 <오디세이>에서도 그 패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맡은 맷 데이먼은 놀란과 세 번째 작업이고,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티노오스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은 두 번째 합류입니다.
이른바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 즉 검증된 배우들을 촘촘하게 배치해 서로의 연기가 맞물리게 하는 구성 방식입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스팅이란 주연 한 명에게 비중을 몰아주기보다, 각 배우가 가진 고유한 색깔로 서사 전체를 분담해 지탱하게 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엔딩 크레디트만 봐도 이 작품의 규모가 짐작될 만큼, 젠데이아·루피타 뇽오·샤를리즈 테론까지 조연 라인업이 두텁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예상 밖이었던 건 톰 홀랜드였습니다. 텔레마코스 역으로,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어깨를 잔뜩 세웠다가 혼자 남으면 그 어깨가 스르르 풀리는 짧은 동작 하나로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의 불안을 눌러 담습니다. 대사 한 줄 없이 몸짓만으로 심경을 전달하는 이 방식은, 보통 블록버스터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절제였습니다.
- 맷 데이먼 — 오디세우스 역, 놀란과 세 번째 협업. 눈빛과 걸음걸이로 십 년을 버틴 왕을 표현
- 앤 해서웨이 — 페넬로페 역, 놀란과 세 번째 협업. 창밖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는 짧은 동작으로 기다림을 압축
- 톰 홀랜드 — 텔레마코스 역. 어깨의 긴장과 이완만으로 소년과 어른 사이 어딘가를 표현
- 로버트 패틴슨 — 안티노오스 역, 놀란과 두 번째 협업. 구혼자의 야심을 절제된 눈빛으로 새김
절제 연기 — 대사를 아낀 자리에 채워지는 것들
영화 연기론에서 '미니멀리즘 연기(minimalist acting)'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니멀리즘 연기란 감정을 과장된 표정이나 목소리로 표출하는 대신, 호흡·시선·미세한 근육 움직임만으로 내면을 전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무대 연기와 달리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파고들 수 있는 영화에서 특히 효과적입니다. <오디세이>는 이 방식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편입니다.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는 큰 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습니다. 동네 2D 상영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첫 파도 소리에 등받이가 울리던 순간, 저는 손에 쥔 티켓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 압도적인 음향 설계 안에서도 데이먼의 연기가 소음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고요하게 떠오르는 건, 그가 화면을 채우는 방식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앤 해서웨이의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을 거두는 짧은 동작 하나로 십 년의 기다림을 압축해 냅니다. 이타카의 창가 장면에서 오히려 화면 속 정적이 숨을 참게 만들었고, 그 침묵의 무게가 스크린 밖으로 넘어와 목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러닝타임 대비 페넬로페의 등장 분량이 짧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기다림의 감각을 더 실감 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화 전반부는 IMAX 필름 촬영의 압도적인 스케일로 괴물과 자연재해를 연달아 쏟아내는데, 그 사이사이 오디세우스의 심경 변화를 따라갈 여유는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미니멀리즘 연기가 빛을 발하려면 관객이 인물 내면에 집중할 공백이 필요한데, 전반부의 스펙터클이 그 공백을 조금 잠식한 느낌이었습니다. 출처: 영국영화협회(BFI)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 놀란 감독의 작품은 시각적 과잉과 인물 서사 사이의 균형이 항상 논의 지점이 됩니다.
재회 서사 — 폭발 대신 쌓아 올린 시간의 무게
서사학(narratology)에서 귀환 서사(nostos narrative)는 주인공이 고난 끝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여기서 귀환 서사란 단순히 물리적 귀환이 아니라, 떠나기 전의 자신과 돌아온 자신 사이의 거리를 관객이 함께 체감하게 만드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호메로스의 원작 <오디세이아>가 서구 문학에서 귀환 서사의 원형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퍼서스 디지털 라이브러리(Perseus Digital Library)
놀란의 <오디세이>가 택한 방식은 재회를 폭발적으로 터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다시 마주하는 순간, 화면은 오히려 조용해집니다. 구혼자들과의 마지막 대결이 몰아치는 동안에도 정작 손에 땀이 밴 건 그 직전,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짧은 눈 맞춤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버텨온 시간이라는 것을, 대사가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정선은 장르적 기대와 충돌할 때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액션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앉았다가 그 침묵에 붙잡히는 경험이 그랬습니다. 보면서 한국 이야기의 결과는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표현할 때 한국 서사는 흔히 감정을 직접적으로 터뜨리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 영화는 감정을 견뎌낸 세월 자체를 인정해 주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 이유가 거기 있었습니다.
텔레마코스의 성장 서사도 인상적인 장면들은 분명했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그의 내면에 남긴 균열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부자 상봉의 카타르시스가 배가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페넬로페의 십 년에 더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했더라면, 이 귀환 서사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더 완전하게 다시 태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신화를 모르면 스토리 따라가기 어렵나요?
A. 제 경우 호메로스 원작을 정독한 적이 없어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영화 자체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귀환하는 여정을 순차적으로 풀어가기 때문에, 신화 배경 지식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읽는 데 집중하면 충분합니다. 다만 구혼자 무리의 관계나 신들의 개입 맥락을 미리 알고 가면 중반부 전개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Q. 특별관(IMAX)이 아닌 일반 2D로 봐도 괜찮을까요?
A. 저도 동네 일반 2D 상영관에서 봤는데, 파도 하나 바위 하나에 실린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IMAX 필름으로 촬영된 시각적 스케일은 특별관에서 더 극대화되겠지만, 이 영화의 핵심인 두 주연의 절제 연기와 감정선은 화면 크기와 상관없이 전달됩니다. 특별관 예매가 어렵다면 일반관도 충분히 값어치 있습니다.
Q. 172분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나요?
A. 입장 전에 저도 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리를 뜰 때 시간을 잊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전반부가 괴물·폭풍 등 시련의 나열로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속도감이 다소 고르지 않다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 감정선이 전면에 나오면서 몰입도가 올라가는 구조라, 전반부를 견디면 나머지는 훨씬 수월하게 흘러갑니다.
Q. 맷 데이먼과 앤 해서웨이 두 사람의 분량 비율은 어떤가요?
A.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바다 여정이 중심 축이기 때문에 스크린 타임은 데이먼 쪽이 압도적으로 깁니다. 해서웨이의 페넬로페는 등장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장면들 안에서 기다림의 감각을 워낙 밀도 있게 쌓아 올려서, 분량이 적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을 만큼 인상이 강했습니다.
결론
정리하면, <오디세이>는 신화적 스펙터클이라는 겉껍질 안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버텨낸 시간이라는 훨씬 단단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172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끝난 뒤에도 파도나 괴물보다 데이먼과 해서웨이의 눈빛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전반부 스펙터클의 속도감 불균형이나 페넬로페 서사의 아쉬운 분량 같은 빈틈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액션의 쾌감보다 침묵의 무게가 스크린 밖으로 넘어오는 순간을 원하는 분이라면, 큰 화면과 진득한 이야기를 동시에 원하는 분이라면, 일반 2D관이라도 충분히 찾아갈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