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승리가 바로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그 사실을 교과서 속 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극장을 나서면서 그 한 줄이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앙상블 캐스팅이 만들어낸 이름 없는 얼굴들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저는 한 가지를 직감했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한 명의 영웅을 내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요. 원신연 감독이 선택한 방식은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 즉 주인공을 특정 한 명으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인물에게 서사를 고르게 분산시키는 구성입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스팅이란 특정 스타 한 명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대신, 개성이 다른 배우 여럿이 동등한 무게로 극을 떠받치는 방식을 말합니다. 한국..
2004년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 바로 실미도입니다. 저는 그 기록보다 극장 문을 나서지 못했던 그 밤이 먼저 떠오릅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던 그 상영관의 공기는, 지금 생각해도 무언가 다른 온도였습니다.역사적 배경 — 서른한 명의 존재를 지운 나라684부대는 1968년 북한의 청와대 기습 사건, 이른바 1·21 사태에 대한 맞대응으로 창설된 비밀 특수부대입니다. 사형수, 무기수, 사회 부적응자로 분류된 서른한 명을 서해의 외딴섬 실미도에 격리시킨 뒤, 김일성 주석궁 침투와 요인 암살이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연좌제(連坐制)라는 굴레 속에서 세상에 발붙일 곳 없던 사람들에게 돌아온 유일한 선택지였습니다. 여기서 연좌제란 본인의 가족이나 친족의 죄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역사 영화겠지"라고 얕잡아 봤습니다. 병자호란의 결말은 이미 아는데 뭐가 새롭겠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넷플릭스로 틀어놓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몸이 저도 모르게 더 움츠러들기 시작하면서,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 땀이 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실감했습니다.이병헌과 김윤석, 목소리를 낮출수록 커지는 긴장감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극적인 장면은 고함과 음악이 함께 치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과 김윤석이 연기한 김상헌이 마주 앉아 논쟁을 벌이는 장면들에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사 한 줄 한 줄..
속편이 원작을 넘은 경우가 과연 몇 편이나 될까요. 일반적으로 속편은 전편의 공식을 반복하다 식상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를 보면서 그 공식이 꼭 맞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미란 혼자 감당하던 저주를 김무열과 나눠 짊어지면서, 이 시리즈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웃음의 밀도와 이야기의 깊이가 꼭 같은 방향을 가리키진 않았습니다.두 배우의 케미가 만든 웃음의 밀도코미디 영화에서 흔히 말하는 "버디 무비(buddy movie)" 구조가 있습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나 처지가 다른 두 인물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고 맞춰가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1편의 라미란이 혼자 저주를 감당하는 구조였다면, 2편은 이 버디 무비의 형식을 가져오면서 웃음..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황당한 설정처럼 들리지만, 영화 '정직한 후보'는 이 질문 하나로 극장 안 관객 전체의 자세를 바꿔놓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가볍게 웃고 나오는 영화겠거니 했는데, 상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걸음이 한참 느렸습니다. 웃음 뒤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영화였습니다.라미란이 없었다면 이 설정은 작동하지 않았을 겁니다혹시 코미디 장르에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이 나온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라미란이 주상숙 역으로 이 상을 받았을 때, 시상식 무대에서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이 배우가 이 캐릭터를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라미란은 '베테랑', '응답하라 1988' 같은 작품..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제목만 보고 그냥 재생 버튼을 눌렀고, 큰 기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노트북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영화 기적은 경북 봉화의 실제 간이역 양원역 건립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라 말을 잃어버린 부자 사이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야기입니다.배우들이 만들어낸 온도 — 사투리 한 마디의 무게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놀랐던 건 배우들의 사투리였습니다. 경북 봉화 사투리를 전 배우가 새로 익혀서 연기했다고 하는데, 어설픈 흉내가 아니라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촬영 역시 강원도 정선과 삼척, 경북 상주와 영주 등 실제 산골 마을을 오가며 진행됐는데, 그 선택이 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