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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황당한 설정처럼 들리지만, 영화 '정직한 후보'는 이 질문 하나로 극장 안 관객 전체의 자세를 바꿔놓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가볍게 웃고 나오는 영화겠거니 했는데, 상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걸음이 한참 느렸습니다. 웃음 뒤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영화였습니다.

라미란이 없었다면 이 설정은 작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코미디 장르에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이 나온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라미란이 주상숙 역으로 이 상을 받았을 때, 시상식 무대에서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이 배우가 이 캐릭터를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라미란은 '베테랑', '응답하라 1988' 같은 작품에서 오랜 시간 조연으로 내공을 다져왔습니다. 앙상블 연기(ensemble acting), 즉 혼자 튀지 않고 주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장면 전체를 살리는 연기 방식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였습니다. 그 내공이 이 작품에서 주연으로 터진 셈인데, 특히 애드리브로 던졌다는 장면들에서 그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극장에서 봤을 때, 각본에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즉흥적인 순간에 오히려 웃음이 더 크게 터졌습니다. 나중에 그게 애드리브였다는 걸 알고 나서야, 관객들이 왜 그 타이밍에 유독 반응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보좌관 박희철 역의 김무열도 진중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리액션 연기로 극에 활력을 더했고, 할머니 옥희 역 나문희의 편안한 존재감은 웃음 사이사이 감정선에 무게를 실어줬습니다.
- 라미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애드리브로 현장 웃음 주도
- 김무열: 당황과 초조함을 오가는 리액션 연기로 코미디 감각 증명
- 나문희: 오랜 경력에서 나오는 무게감으로 극의 감정선 지탱
- 윤경호: 능청스러운 남편 연기로 웃음 포인트를 꾸준히 공급
풍자 코미디가 설교로 미끄러지지 않은 이유
이 영화의 장르는 풍자 코미디(political satire comedy)입니다. 풍자 코미디란 사회나 정치의 모순을 웃음의 재료로 삼아 비판하는 방식인데, 문제는 이 장르가 잘못 다루면 관객을 훈계하는 쪽으로 쉽게 흘러간다는 점입니다. 청탁, 학교 비리, 병역 특혜 같은 소재가 나왔을 때 저도 순간 몸이 굳었는데, 그게 설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야기가 인물의 당황스러움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짓말을 못 하게 된 상숙이 생방송 토론회에서 직설적인 답을 던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상대 후보들이 정치적 화법으로 말을 돌리는 사이, 상숙 혼자 속마음을 그대로 뱉어내는 그 순간마다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서 등이 떨어졌습니다. 다음 대사를 기다리며 앞으로 쏠린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팔걸이를 사이에 두고 앉은 낯선 옆자리 관객과 같은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고 같은 타이밍에 입이 다물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2014년 브라질에서 제작돼 현지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한국판 각색은 브라질의 정치 설정을 한국 정치판의 정서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캐릭터 이중성(character duality), 즉 카메라 앞에서의 얼굴과 카메라 뒤의 얼굴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 구조를 한국 관객이 바로 체감할 수 있는 맥락 위에 얹었다는 점입니다. 그 덕에 리메이크라는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계에 따르면 코미디 장르는 한국 상업영화 흥행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해 왔지만(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정치 풍자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흥행까지 잡은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정직한 후보'가 그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카타르시스는 확실했지만, 후반부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후반부에서 기자가 옥희재단의 입학 비리를 파헤치는 장면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웃던 입이 슬쩍 다물어지고, 청탁이니 비리니 하는 단어들이 스크린에 뜰 때마다 팔짱 낀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 무게감 자체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재단 비리 폭로 이후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가 눈에 띄게 서둘러지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초반에 꼼꼼하게 쌓아 올린 캐릭터의 이중성이 후반부의 속도감 속에서 다소 헐겁게 풀려버립니다. 클라이맥스 씬(climax scene), 즉 이야기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의 감정적 무게가 앞부분만큼 단단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쉽게 말해 앞에서 쌓은 만큼 마지막에 터지지 않는 느낌입니다.
이런 문제는 각색 과정에서 상영 시간의 제약과 충돌할 때 자주 발생합니다. 영화 평론 전문 매체 씨네 21에 따르면 이 영화의 각색은 한국 정치 현실을 반영한 디테일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출처: 씨네 21), 후반 전개의 밀도가 전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 역시 함께 나왔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숙이 거짓말 없이 무대 위에 서는 장면에서 느꼈던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그 쾌감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무릎 위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가방에 넣은 게 은호 입대 선언 장면부터였는데, 조명이 켜질 때까지 끝내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한 셈입니다.
- 강점: 거짓말 불능 설정에서 뽑아낸 풍자의 밀도, 배우 앙상블의 완성도
- 약점: 재단 비리 폭로 이후 후반부 전개가 급하게 수습되는 인상
- 총평: 웃음 뒤의 씁쓸함, 즉 카타르시스와 비판 의식을 동시에 건드리는 드문 코미디
정치인이 진심을 숨기지 못하게 됐을 때 오히려 더 당당해 보인다는 역설, 이게 이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코미디가 맞는데 마냥 가볍지 않고, 풍자인데 훈계처럼 느껴지지 않는 균형은 라미란이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유지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치 뉴스를 보다가 지쳐 있거나, 극장에서 크게 웃고 싶은데 나온 뒤에 허무하기 싫다면 이 영화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