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영화는 결국 승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편견을 버린 건 자정 무렵 소파에 앉아 를 켠 날 밤이었습니다. 아이들 재우고 와이프도 먼저 잠든 조용한 거실에서, 냉동만두 접시를 옆에 두고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 결과가 아니라 태도를 응시하는 영화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투구폼 하나가 젓가락질을 멈추게 했습니다스포츠 영화 속 선수 연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어색하거나. 일반적으로 배우가 운동 동작을 소화할 때 아무리 훈련해도 비전문가 특유의 어색함이 남는다고들 하는데, 이주영의 투구폼(pitching motion)을 처음 봤을 때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여기서 투구폼이란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기 위해 취하..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흔히 긴장감 없이 웃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그 편견이 꽤 크게 흔들렸습니다. 평범한 전자제품 수리공이 기내 납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꺼내 드는 이야기, 오케이 마담입니다. 퇴근 후 별 기대 없이 소파에 누워 재생 버튼을 눌렀다가 어느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박성웅이라는 배우, 다시 봤습니다일반적으로 액션 배우는 처음부터 강인한 인상을 풍겨야 몰입이 된다고들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오케이 마담에서 박성웅이 연기한 오석환은 낡은 라디오를 고치며 어수룩하게 웃는 수리공으로 등장합니다. 그 손이 기내 통로에서 총을 고쳐 쥐는 순간, 화면 안팎의 온도가 동시에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이 캐..
명절 오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걸린 영화 한 편이 어느새 거실을 통째로 삼켜버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2021년 추석에 그 영화가 담보였습니다. 성동일의 첫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창밖이 완전히 캄캄해진 뒤에야 영화가 끝났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사채업자와 아홉 살 아이 사이에서 가족이 만들어지는 이야기, 그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습니다.성동일·김희원·박소이, 세 얼굴이 만든 앙상블배우 세 명이 스크린 위에서 만들어내는 앙상블(ensemble)이란, 단순히 각자 연기를 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앙상블이란 각 배우의 타이밍과 호흡이 맞물려 전체 장면의 리듬 자체를 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담보는 이 점에서 제가 최근 몇 년간 본 한국 상업영화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솔직히 고백하면, 재생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파에 리모컨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냥 배경음 삼아 틀어놓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라는 자막 한 줄이 뜨는 순간,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교섭', 황정민과 현빈이 만든 긴장의 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따져봤습니다.두 배우가 만든 대비, 그 균형이 영화의 뼈대다'교섭'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캐릭터 설계입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외교관 재호는 위기협상(Crisis Negotiation) 전문가입니다. 위기협상이란 인질·농성·자해 등 급박한 상황에서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
재난영화인데 웃기다면 믿어지십니까. 영화 은 서울 한복판 신축빌라가 500미터 아래로 꺼지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밤 열한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봤는데, 조였다 풀렸다를 반복하다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습니다.이웃이라는 관계, 처음엔 그냥 귀찮은 사람 아니었나요내 집 마련에 11년이 걸렸다는 설정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동원(김성균)이 신축빌라 열쇠를 쥐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은근한 불안을 깔아 두는데, 이사 첫날 맞닥뜨린 이웃 만수(차승원)가 그 불안을 코미디로 덮어버립니다.차승원의 완급 조절은 제가 직접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한 마디에 픽 웃음이 새는 그 타이밍,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장면을 끌고 가는 힘이 이 영화 초반부 전체를 지..
잔잔한 영화가 더 오래 남는다는 말,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을 넘긴 거실에서 혼자 《미나리》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식을 때까지 손도 못 댄 만두 접시를 치우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그 밤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합니다.화려함 없이도 진짜인 얼굴들 — 앙상블 연기좋은 연기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연기력을 따질 때 감정 폭발의 순간을 기준점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나리》의 배우들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저를 무너뜨렸습니다.스티븐 연이 연기한 제이콥은 성공을 향한 조바심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표정 하나에 담아냅니다. 여기서 앙상블(ensemble) 연기란 특정 배우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모든 출연진이 유기적으로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