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확률 3.48%. 영화 이 내세운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장치로 읽혔습니다. 그런데 막상 화면 앞에 앉으니 그 숫자가 몸으로 먼저 왔습니다. 개봉 한참 지난 뒤 조용한 밤 OTT를 켰을 때, 이불을 끌어안은 두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던 그 감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배우 케미 — 장갑차 안에서 만들어진 것재난 영화는 보통 스케일로 승부한다고들 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에서 눈을 붙들어둔 건 무너지는 도심이 아니라, 좁은 장갑차 안에서 하정우와 이병헌이 주고받는 호흡이었습니다. 스피커를 타고 방바닥까지 전해지던 저음보다, 두 배우가 대사를 치고받는 리듬에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이 장면들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 신기해집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찍은 게 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865만 명을 돌파한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숫자보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저녁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거실에 어묵탕 냄새가 은은하게 깔리던 그날 밤, 국자를 든 손이 화면 앞에서 멈춰버렸고, 식탁 위 그릇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코미디라기엔 뭔가 더 있었던 영화, 수상한 그녀입니다.두 배우, 한 인물: 캐릭터 분석이 먼저다수상한 그녀를 이해하려면 캐릭터 설계부터 짚어야 합니다. 칠순 할머니 오말순은 나문희와 심은경, 두 배우가 나눠 맡는 구조입니다. 이걸 업계에서는 듀얼 캐스팅(Dual Casting)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듀얼 캐스팅이란 동일 인물을 시간대나 상황에 따라 두 배우가 분담해 연기하는 방식으로, 단순한 회상 장면 ..
2005년 개봉한 왕의 남자는 관객 1,230만 명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숫자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직접 극장에서 마주한 뒤로는 납득이 됐습니다. 단순히 볼거리가 풍성한 사극이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결이 살아 숨 쉬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연기력 — 대사 없이도 전달되는 것들콜라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걸 잊었습니다.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 방금까지 아이처럼 웃다가 다음 컷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일입니다.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 있던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고, 무릎 위 팝콘 통엔 그 이후로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이 장면에서 정진영이 구사한 것은 내면 연기(internal acting)에 가깝습니다. 내면 연기란..
스튜디오 지브리가 1986년 첫 번째 극장판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거실 스피커에서 도라호의 포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몸이 반응했습니다. 오래된 명작이라는 말이 때로 얼마나 실감 없이 쓰이는지, 이 영화 앞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성우진 — 목소리만으로 캐릭터를 완성한다는 것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성우진은 화면을 보조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라퓨타를 보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파즈를 연기한 타나카 마유미의 목소리는 소년 특유의 패기와 불안감을 동시에 얹고 있어서, 화면을 안 봐도 그 아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성우(聲優), 즉 목소리 배우라는 직군은 표정이나 몸짓 없이 오직 음성..
코미디 영화는 집에서 봐도 충분하다고 굳게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산산이 부순 작품이 2017년 개봉한 입니다. 웃으러 들어간 극장에서 팝콘도 제대로 못 삼키고 나왔던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머니 얼굴이 겹쳐 떠올랐습니다.코미디의 함정 — 웃음이 쌓일수록 무너지는 구조일반적으로 코미디 영화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웃기면 그만이고, 깊이보다는 속도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죠.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는 웃음을 무기가 아니라 덫으로 씁니다.영화의 전반부는 정통 버디 코미디(Buddy Comedy)에 가깝습니다. 버디 코미디란 성격이 정반대인 두 인물이 부딪히고 화해하는 과정을 축으로 삼는 장르 문법인데, 민원 8천 건의 '도깨비 할머니' 옥분과 규정..
2001년 개봉 당시 관객 수 480만 명. 지금 기준으로도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지만, 당시 한국 영화 시장 규모를 감안하면 이건 그야말로 이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변의 한 조각을 교복 바지 밑단에 겨울바람이 스며들던 날, 캐러멜 팝콘 냄새 가득한 상영관에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스크린 속 전지현이 대머리 아저씨 머리 위로 속을 게워내는 순간, 씹던 팝콘을 삼키지도 못한 채 터뜨린 그 웃음이 지금도 선명합니다.장르 혁신 — 순종적 여성상을 뒤집은 배짱이 영화가 처음 기획됐을 때 제작진이 감수해야 했던 리스크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원작은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된 실제 연애담이었고, 주연 전지현은 CF 모델로만 얼굴이 알려진 신인이었습니다. 연기력에 대한 검증이 전무한 배우에게 감정의 진폭이 극단에 달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