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아이들이 보자고 졸라대는 영화를 뭘 틀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치킨 배달 앱을 열자마자 아들 녀석이 화면을 가리키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렇게 반강제로 시작한 두리틀이 치킨 상자를 중간에 덮어버리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언맨 수트를 벗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이번엔 동물들과 대화하는 의사로 돌아왔습니다.캐스팅 하나로 영화 반은 먹고 들어간다솔직히 처음엔 기대치가 높지 않았습니다. 가족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어른에게는 좀 심심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화면이 켜지고 5분도 안 돼서 자세가 바뀌었습니다. 말투부터 걸음걸이까지, 아이언맨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거기 있었습니다.이 영화의 핵심 강점은 보이스 캐스팅(voic..
스포츠 영화는 결국 승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편견을 버린 건 자정 무렵 소파에 앉아 를 켠 날 밤이었습니다. 아이들 재우고 와이프도 먼저 잠든 조용한 거실에서, 냉동만두 접시를 옆에 두고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 결과가 아니라 태도를 응시하는 영화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투구폼 하나가 젓가락질을 멈추게 했습니다스포츠 영화 속 선수 연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어색하거나. 일반적으로 배우가 운동 동작을 소화할 때 아무리 훈련해도 비전문가 특유의 어색함이 남는다고들 하는데, 이주영의 투구폼(pitching motion)을 처음 봤을 때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여기서 투구폼이란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기 위해 취하..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흔히 긴장감 없이 웃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그 편견이 꽤 크게 흔들렸습니다. 평범한 전자제품 수리공이 기내 납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꺼내 드는 이야기, 오케이 마담입니다. 퇴근 후 별 기대 없이 소파에 누워 재생 버튼을 눌렀다가 어느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박성웅이라는 배우, 다시 봤습니다일반적으로 액션 배우는 처음부터 강인한 인상을 풍겨야 몰입이 된다고들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오케이 마담에서 박성웅이 연기한 오석환은 낡은 라디오를 고치며 어수룩하게 웃는 수리공으로 등장합니다. 그 손이 기내 통로에서 총을 고쳐 쥐는 순간, 화면 안팎의 온도가 동시에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이 캐..
명절 오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걸린 영화 한 편이 어느새 거실을 통째로 삼켜버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2021년 추석에 그 영화가 담보였습니다. 성동일의 첫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창밖이 완전히 캄캄해진 뒤에야 영화가 끝났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사채업자와 아홉 살 아이 사이에서 가족이 만들어지는 이야기, 그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습니다.성동일·김희원·박소이, 세 얼굴이 만든 앙상블배우 세 명이 스크린 위에서 만들어내는 앙상블(ensemble)이란, 단순히 각자 연기를 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앙상블이란 각 배우의 타이밍과 호흡이 맞물려 전체 장면의 리듬 자체를 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담보는 이 점에서 제가 최근 몇 년간 본 한국 상업영화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솔직히 고백하면, 재생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파에 리모컨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냥 배경음 삼아 틀어놓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라는 자막 한 줄이 뜨는 순간,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교섭', 황정민과 현빈이 만든 긴장의 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따져봤습니다.두 배우가 만든 대비, 그 균형이 영화의 뼈대다'교섭'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캐릭터 설계입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외교관 재호는 위기협상(Crisis Negotiation) 전문가입니다. 위기협상이란 인질·농성·자해 등 급박한 상황에서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
재난영화인데 웃기다면 믿어지십니까. 영화 은 서울 한복판 신축빌라가 500미터 아래로 꺼지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밤 열한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봤는데, 조였다 풀렸다를 반복하다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습니다.이웃이라는 관계, 처음엔 그냥 귀찮은 사람 아니었나요내 집 마련에 11년이 걸렸다는 설정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동원(김성균)이 신축빌라 열쇠를 쥐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은근한 불안을 깔아 두는데, 이사 첫날 맞닥뜨린 이웃 만수(차승원)가 그 불안을 코미디로 덮어버립니다.차승원의 완급 조절은 제가 직접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한 마디에 픽 웃음이 새는 그 타이밍,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장면을 끌고 가는 힘이 이 영화 초반부 전체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