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영화가 더 오래 남는다는 말,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을 넘긴 거실에서 혼자 《미나리》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식을 때까지 손도 못 댄 만두 접시를 치우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그 밤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합니다.화려함 없이도 진짜인 얼굴들 — 앙상블 연기좋은 연기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연기력을 따질 때 감정 폭발의 순간을 기준점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나리》의 배우들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저를 무너뜨렸습니다.스티븐 연이 연기한 제이콥은 성공을 향한 조바심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표정 하나에 담아냅니다. 여기서 앙상블(ensemble) 연기란 특정 배우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모든 출연진이 유기적으로 맞..
가짜 가족끼리 나눈 감정이 진짜일 수 있을까요? 블랙 위도우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저는 돌비 사운드관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좌석 등받이가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게 흔한 히어로물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몸으로 먼저 알아챘습니다.가짜 가족이라서 오히려 더 실감 났던 배경히어로 영화에서 가족이 등장하면 보통 "지켜야 할 대상"으로 소비됩니다. 그런데 블랙 위도우의 가족은 처음부터 위장이었다는 점,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1995년 오하이오를 배경으로 한 오프닝에서 알렉세이, 멜리나, 어린 나타샤와 옐레나는 소련의 첩보 임무를 위해 꾸며진 스파이 셀(Spy Cell)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스파이 셀이란 적국 내에 위장 침투해 활동하는 소규모 공작 단위를 말하는데, 이들은 평범..
집 안 불을 다 끄고 모니터 하나만 켜둔 채로 튼 밤이었습니다. 2021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외교관들이 함께 탈출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처음엔 그냥 액션 영화겠거니 했는데, 두 시간 내내 방 안의 정적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쯤엔 몸에 힘이 다 빠져 있었습니다.어두운 방에서 만난 얼굴들 — 배우 앙상블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타 배우 두 명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면 보통 한 명이 화면을 압도하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소비되기 마련인데, 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화면 안에 있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무게를 지고 움직인다는 느낌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됐습니다.한신성 대사 역의 김윤석은 앙상블 연기(ensemble acting),..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영화를 보다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올빼미를 보던 그날 밤, 뻗었던 손을 소현세자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그대로 허공에 멈췄습니다. 조선 궁중의 어둠을 주맹증이라는 낯선 설정 하나로 서스펜스 엔진 삼은 이 영화, 류준열과 유해진의 신체 연기가 얼마나 무섭게 맞물리는지 직접 겪어보니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주맹증 설정, 서스펜스의 출발점영화를 보기 전에 '주맹증'이라는 단어를 미리 찾아봤습니다. 주맹증(晝盲症)이란 밝은 환경에서는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어두운 환경에서 오히려 사물 윤곽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 장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눈입니다. 영화 속 경수는 이 조건을 궁궐 안에서 철저히 숨기며 살아가..
김혜수와 염정아, 두 배우가 동시에 화면을 채우는 장면만으로 이미 본전을 뽑는 영화입니다. 처음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켰을 때, 솔직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배우들의 존재감이 서사보다 먼저 말을 거는 영화, 밀수입니다.캐스팅만으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영화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스팅이란 주연 한 명이 이야기를 이끌기보다 여러 배우가 각자의 무게로 화면을 함께 채워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밀수는 이 앙상블 캐스팅의 교과서에 가까웠습니다.김혜수가 조처자로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등줄기가 반응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고,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이 사람이 판을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화면 ..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 개봉 당시 역대 흥행 3위를 기록했습니다. 처음엔 그 수치가 잘 와닿지 않았는데, 아이들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번갈아 넣다가 어느 순간 다들 말을 잃는 걸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닿았는지를요.재난 표현 — 스펙터클이 아닌 애도의 방식재난 영화라고 하면 흔히 폭발과 붕괴 장면을 볼거리로 내세운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비슷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이 영화는 그 공식과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무너진 온천 마을이나 버려진 유원지 같은 폐허 공간에 카메라를 오래 세워둡니다. 여기서 이 연출 방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