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 별 기대 없이 동네 씨네큐 좌석에 앉았다가 팔걸이를 손땀 젖게 쥐었던 영화입니다. DC가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 새 판을 짜는 시도 중 하나인 은, 제가 예상하던 '착하고 밝은 금발 히어로물'과는 출발점 자체가 달랐습니다. 냉소와 무기력함을 몸에 두른 카라 조엘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풀어보겠습니다.밀리 앨콕이 설득한 것들 — 대사 없이 전해진 캐릭터 변화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삼십 분 가까이, 화면엔 영웅의 사명감 대신 무기력(apathy)만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무기력이란 단순히 의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은 넘치지만 그것을 쓸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 특유의 공허함을 뜻합니다.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반려동물 크립토와 함께 이 행성 저 행성을..
솔직히 이건 기대 없이 틀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게 된 영화였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늦은 오후, 창가에 스탠드 하나만 켜두고 웨이브를 열었는데 중반부터는 담요 끝자락을 꽉 쥐고 있는 제 손을 발견했습니다. 배성우의 6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끝장수사》, 뻔한 형사물 공식 안에서 얼마나 살아 있는 영화인지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배성우, 대사 없이도 다 말하는 배우배우에게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배우가 한 역할을 통해 굳혀온 고유한 이미지, 즉 스크린 안에서 반복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의 결을 뜻합니다. 배성우의 경우, '강력반 진돗개'라는 별명을 가진 형사 재혁이 그 페르소나를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파출소 창밖을 응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열여섯 명이 한 밥상에 둘러앉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저는 그 마지막 프레임에서 손에 쥔 캔맥주가 언제 미지근해졌는지도 몰랐습니다. 거창한 반전도, 화려한 연출도 없는데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되짚고 있습니다.부자관계: 침묵이 대사보다 무거운 이유노포(老鋪) 만두집 사장이 하나뿐인 아들의 삭발 소식을 듣는 장면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여기서 노포란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가게를 뜻하는데, 이 단어 하나에 무옥이라는 인물의 삶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대를 이어 만두집을 물려주겠다는 평생의 설계가 아들 한 명의 출가 결심으로 흔들리는 구조입니다.김윤석과 이승기가 만들어내는 부자 사이의 긴장감은 대사보다 침묵과 표정으로 채워집니다. 저는 솔직히 이승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틀기 전까지 밀림 배경 코미디라는 말만 듣고 꽤 기대를 했습니다. 류승룡에 진선규, 거기다 실제 브라질 배우들까지 붙었다는 조합이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은 제법 그럴듯했거든요. 퇴근길에 치킨 한 마리 포장해 와서 소파에 퍼질러 앉아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가 느낀 감정은 기대와 딱 절반쯤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어긋났는지, 그리고 그래도 볼 만한 이유가 있는지를 제 경험 기준으로 풀어보겠습니다.류승룡·진선규 캐스팅이 이 영화의 가장 확실한 답이다영화를 고를 때 캐스팅이 일종의 품질보증(Quality Assurance)처럼 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품질보증이란, 배우의 필모그래피와 연기 신뢰도가 작품 선택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주말 오후, 리모컨을 쥐고 뭘 볼지 한참 채널을 넘기다 멈춘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날 치킨 상자를 뜯으면서 오래 묵혀두었던 영화 하나를 꺼냈습니다. 경찰대생 둘이 무면허로 사건을 쫓는다는 설정에 처음엔 '뻔하겠지' 싶었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니 상자 안에는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영화 , 뒤늦게 본 게 조금 억울해진 작품입니다.박서준과 강하늘, 온도차가 만든 케미버디무비(buddy movi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격이나 배경이 판이하게 다른 두 인물이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구조인데, 이 공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캐스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 그 공식을 교과서처럼 따릅니다. 미혼모 어머니를 위해 경찰대에 입학한 박기준(박서준)은 앞뒤 재지 않고 몸부터 던지..
개봉 당시 누적 관객 865만 명을 돌파한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숫자보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저녁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거실에 어묵탕 냄새가 은은하게 깔리던 그날 밤, 국자를 든 손이 화면 앞에서 멈춰버렸고, 식탁 위 그릇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코미디라기엔 뭔가 더 있었던 영화, 수상한 그녀입니다.두 배우, 한 인물: 캐릭터 분석이 먼저다수상한 그녀를 이해하려면 캐릭터 설계부터 짚어야 합니다. 칠순 할머니 오말순은 나문희와 심은경, 두 배우가 나눠 맡는 구조입니다. 이걸 업계에서는 듀얼 캐스팅(Dual Casting)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듀얼 캐스팅이란 동일 인물을 시간대나 상황에 따라 두 배우가 분담해 연기하는 방식으로, 단순한 회상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