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면, 재생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파에 리모컨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냥 배경음 삼아 틀어놓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라는 자막 한 줄이 뜨는 순간,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교섭', 황정민과 현빈이 만든 긴장의 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따져봤습니다.두 배우가 만든 대비, 그 균형이 영화의 뼈대다'교섭'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캐릭터 설계입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외교관 재호는 위기협상(Crisis Negotiation) 전문가입니다. 위기협상이란 인질·농성·자해 등 급박한 상황에서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
재난영화인데 웃기다면 믿어지십니까. 영화 은 서울 한복판 신축빌라가 500미터 아래로 꺼지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밤 열한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봤는데, 조였다 풀렸다를 반복하다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습니다.이웃이라는 관계, 처음엔 그냥 귀찮은 사람 아니었나요내 집 마련에 11년이 걸렸다는 설정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동원(김성균)이 신축빌라 열쇠를 쥐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은근한 불안을 깔아 두는데, 이사 첫날 맞닥뜨린 이웃 만수(차승원)가 그 불안을 코미디로 덮어버립니다.차승원의 완급 조절은 제가 직접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한 마디에 픽 웃음이 새는 그 타이밍,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장면을 끌고 가는 힘이 이 영화 초반부 전체를 지..
잔잔한 영화가 더 오래 남는다는 말,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을 넘긴 거실에서 혼자 《미나리》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식을 때까지 손도 못 댄 만두 접시를 치우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그 밤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합니다.화려함 없이도 진짜인 얼굴들 — 앙상블 연기좋은 연기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연기력을 따질 때 감정 폭발의 순간을 기준점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나리》의 배우들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저를 무너뜨렸습니다.스티븐 연이 연기한 제이콥은 성공을 향한 조바심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표정 하나에 담아냅니다. 여기서 앙상블(ensemble) 연기란 특정 배우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모든 출연진이 유기적으로 맞..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영화를 보다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올빼미를 보던 그날 밤, 뻗었던 손을 소현세자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그대로 허공에 멈췄습니다. 조선 궁중의 어둠을 주맹증이라는 낯선 설정 하나로 서스펜스 엔진 삼은 이 영화, 류준열과 유해진의 신체 연기가 얼마나 무섭게 맞물리는지 직접 겪어보니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주맹증 설정, 서스펜스의 출발점영화를 보기 전에 '주맹증'이라는 단어를 미리 찾아봤습니다. 주맹증(晝盲症)이란 밝은 환경에서는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어두운 환경에서 오히려 사물 윤곽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 장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눈입니다. 영화 속 경수는 이 조건을 궁궐 안에서 철저히 숨기며 살아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둔 서재에서 쿠팡플레이 재생 목록을 뒤적이다가, 강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에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청부 살인을 완벽한 사고사로 둔갑시키는 설계자의 이야기는, 그날 밤 제 휴대폰을 뒤집어 놓게 만든 영화였습니다.강동원과 이무생, 눈빛으로 서사를 끌고 가다영화 첫 장면부터 느낌이 달랐습니다. 주인공 영일이 신호 체계와 사람들의 동선을 계산해 사고를 설계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무릎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을 뒤집어 놨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아챘습니다. 강동원이 택한 연기 방식은 제가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그는 표정을 거의 바꾸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 접근법은 미니멀리즘 연기(minimalism acting)라고 부를 수 있는데, 쉽게..
솔직히 말하면, 결혼기념일 저녁에 이혼 직전 부부 이야기를 고른 게 과연 잘한 선택이었는지, 상영관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뒤 출구를 빠져나오며 든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이 다시 서로에게 끌리는 과정을 보면서, 결혼 생활에서 우리가 정말 마모시켜온 게 무엇인지를 가볍지만 날카롭게 건드리는 영화였습니다.결혼기념일에 이혼 영화를 고른 이유극장 통로 끝 커플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에어컨 바람이 유독 세게 느껴졌습니다. 스크린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라의 서늘한 표정이 떠오르자 옆자리 공기도 순간 가라앉는 것 같았고, 팔걸이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습니다.영화 《30일》은 이혼 조정을 앞둔 부부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으면서 다시 서로에게 끌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