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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저녁, 별 기대 없이 동네 씨네큐 좌석에 앉았다가 팔걸이를 손땀 젖게 쥐었던 영화입니다. DC가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 새 판을 짜는 시도 중 하나인 <슈퍼걸>은, 제가 예상하던 '착하고 밝은 금발 히어로물'과는 출발점 자체가 달랐습니다. 냉소와 무기력함을 몸에 두른 카라 조엘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풀어보겠습니다.
밀리 앨콕이 설득한 것들 — 대사 없이 전해진 캐릭터 변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삼십 분 가까이, 화면엔 영웅의 사명감 대신 무기력(apathy)만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무기력이란 단순히 의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은 넘치지만 그것을 쓸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 특유의 공허함을 뜻합니다.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반려동물 크립토와 함께 이 행성 저 행성을 떠도는 카라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있었습니다.
밀리 앨콕은 HBO 시리즈 <하우스 오브 더 드래건>에서 어린 라에니라를 연기하며 이름을 알린 배우입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 속에서 여러 겹의 감정을 오가야 했던 그 경험이,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슈퍼걸의 이중적인 감정선을 표현하는 데 고스란히 녹아든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그녀가 대사 한 줄 없이도 눈빛 하나로 인물의 피로를 밀어붙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단순히 예쁘게 웃는 얼굴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설득력입니다.
전환점은 반려동물 크립토가 크렘 무리에게 크게 다치는 순간입니다. 화면 색이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으면서, 저는 시야 끝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카라가 술집 바닥에 떨어진 잔을 지나쳐 걸어 나가는 뒷모습, 카메라가 그 정적을 오래 붙잡고 있는 동안 저도 모르게 등을 조금씩 세우고 있었습니다. 거창한 연설도, 감동적인 대사도 없었습니다. 그냥 뒷모습 하나였는데, 그 정적이 어떤 대사보다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브 리들리가 연기한 루시 역시 극의 또 다른 축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카라를 몰아붙이는 장면들에서, 이 인물이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카라와 루시, 상실을 안고 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우주선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종류의 외로움이 전해지는,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야기 안에서 인물이 내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궤적을 뜻하는 말인데, 이 영화는 그 아크를 쌓는 데 상영시간의 절반 이상을 쏟아붓습니다. 슈트를 갖춰 입는 장면이 후반부에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힘을 숨기고 살아온 여자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감독은 꽤 오랜 시간을 아껴두었습니다.
- 밀리 앨콕: 대사 없이 눈빛과 뒷모습만으로 인물의 내면 변화를 설득하는 연기력
- 이브 리들리: 카라의 감정선을 흔들고 극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루시 역
- 캐릭터 아크 중심 구성: 슈트 착용까지의 긴 호흡이 후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냄
- 크럼홀츠·비첨의 조엘 부부: 짧은 등장이지만 카라의 성격 형성 배경을 설명하는 실마리
액션과 완급 조절 — 좌석 팔걸이를 손 땀 젖게 만든 것들
크렘의 우주선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순간부터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음이 좌석 등받이를 타고 올라와 흉통을 두드렸습니다. 동네 씨네큐, 별다를 것 없는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팔걸이를 쥔 손끝에 땀이 배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의 액션이 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카메라가 인물을 바짝 붙잡고 따라가는 방식, 이른바 핸드헬드(handheld) 촬영 기법 덕분입니다. 핸드헬드란 카메라를 삼각대 없이 손이나 어깨에 얹어 촬영하는 방식으로, 흔들림과 밀착감이 살아있어 관객이 화면 속 인물과 함께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타격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슴팍으로 튀어 들어오는 듯했고, 슈트를 갖춰 입은 카라가 크렘 무리와 맞붙는 마지막 대결에서는 숨을 참았다가 몰아쉬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팽팽한 긴장을 적절히 풀어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제이슨 모모아가 연기한 현상금 사냥꾼 로보입니다. 원작 만화에는 없던 캐릭터인데, 극의 무게를 덜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모모아가 등장할 때마다 극장 안 공기가 확 풀어지던 것, 저는 그 순간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어깨가 잠깐씩 풀렸다가, 다시 전투 장면이 시작되면 팔걸이를 고쳐 쥐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완급 조절이라는 측면에서, 로보의 존재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영리한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빌런인 크렘 역의 마티아스 스후나르츠는 불쾌할 만큼 태연한 얼굴로 학살을 저지르는 캐릭터를 소화해 냈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서늘하고 태연한 얼굴은 인상적이었지만, 크렘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그 배경 서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악당의 동기(motivation)가 희박하면 — 동기란 인물이 그 행동을 하는 심리적 이유를 뜻합니다 — 위협감이 표면에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크렘이 충분히 무섭게 느껴지긴 했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빌런이 되기엔 서사적 깊이가 아쉬웠습니다.
DC 확장 유니버스(DCU), 즉 제임스 건 감독이 새로 설계한 DC 세계관의 연속성이라는 측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슈퍼맨>(2025)에서 이미 카메오로 얼굴을 비췄던 데이비드 코런스웻이 사촌 칼엘로 다시 등장하며 세계관의 이어달리기를 완성합니다. 실제로 출처: DC Comics 공식에 따르면 카라 조엘은 칼엘보다 나이가 많지만 크립톤에서 지구로 오는 여정이 늦어져 그보다 어리게 지구에 도착한 캐릭터로, 이 설정이 영화 안에서 카라의 정체성 혼란을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제가 직접 챙겨보니, 이 설정을 알고 보면 카라의 냉소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구조적인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임이 더 선명하게 읽혔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를 때쯤엔 목이 뻐근할 정도로 화면에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영화 서사 분석 플랫폼인 출처: Rotten Tomatoes에서도 이 작품의 액션 연출과 앨콕의 퍼포먼스에 대한 평단 반응이 긍정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걸 확인했는데, 제가 극장에서 느꼈던 감각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슈퍼걸 영화, 슈퍼맨 먼저 보고 가야 하나요?
A.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슈퍼맨>(2025)을 먼저 보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큰 무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데이비드 코런스웻의 칼엘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전작을 본 관객이 느끼는 반가움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어서, 시간이 된다면 먼저 챙겨보는 편이 세계관의 이어달리기를 즐기는 데 유리합니다.
Q. 밀리 앨콕이 슈퍼걸로 어울리나요? 기존 이미지랑 너무 다르지 않나요?
A. 처음엔 저도 '왕좌의 암투극 배우가 슈퍼히어로를?'이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그 전작 경험이 이 역할에 딱 맞는 무기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겹의 감정을 오가야 했던 라에니라 역의 내공이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슈퍼걸의 이중적인 감정선을 표현하는 데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Q. 어린아이랑 같이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요?
A. 크렘 무리의 학살 장면이나 전투의 타격감이 꽤 강하게 연출되어 있어서, 어린 연령대에게는 자극적일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성장과 상실을 다루는 정서적인 내용이라 내용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액션 장면의 수위는 미리 확인하고 판단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Q. 제이슨 모모아 로보,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A. 주연급은 아니지만 중요한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제가 극장에서 느낀 건, 그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극장 안 공기가 확 풀어질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는 점입니다. 무거워지기 쉬운 복수극 한가운데서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캐릭터로, 분량 대비 인상이 매우 강하게 남았습니다.
결론
오랜만에 극장에서 느껴본 뒷맛이 긴 영화였습니다. 상영관을 나서면서도 한동안 카라의 마지막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다음 DCU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감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섰습니다. 중반 리듬이 한 번 늘어지는 구간이 있고 크렘의 동기 서사가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밀리 앨콕이 쌓아 올린 캐릭터 아크의 무게가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히어로 영화에 지쳤다는 분들에게도, 한 번쯤 이 버전의 슈퍼걸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착하고 밝은 금발 히어로가 아니라, 냉소와 상실을 안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 분명히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