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분짜리 영화 앞에서 망설인 적이 있습니다. 특별관도 아니고 동네 2D 상영관이었는데, 티켓을 끊고 나서도 "이 러닝타임을 버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뜰 때 시간을 잊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는 스펙터클로 시작해서 두 사람의 눈빛으로 끝나는 영화였습니다.배우 앙상블 — 낯익은 얼굴들이 만들어낸 낯선 깊이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신뢰하는 배우를 반복해서 기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번 에서도 그 패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맡은 맷 데이먼은 놀란과 세 번째 작업이고,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티노오스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은 두 번째 합류입니다.이른바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 즉 검증..
《써니》는 2011년 개봉해 최종 736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그 숫자를 다시 꺼낸 건, 마흔을 넘긴 평일 밤 혼자 티빙 화면을 켰을 때 그 숫자가 왜 나왔는지 비로소 실감했기 때문입니다.편집 리듬이 만든 시간차《써니》가 단순한 회상 영화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편집 리듬(montage rhythm) 덕분입니다. 여기서 편집 리듬이란 과거 장면과 현재 장면을 교차 배치하는 방식으로, 관객이 두 시간대를 동시에 체감하도록 유도하는 영화 편집의 핵심 기법입니다.열일곱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끝나면 다음 장면에서 마흔 명의 지친 얼굴이 이어집니다. 제가 재관람하면서 알아챈 건, 그 전환이 올 때마다 숨을 잠깐 참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서른 초반에 처음 극장에서 볼 때는 그냥 흘려보냈던 그 낙차가, 이번엔..
결말을 이미 아는 영화에서 손에 땀이 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확신했습니다. 141분 내내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이 빠지질 않았고, 장인어른과 동서와 셋이 로비로 나와서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아홉 시간의 기록이 스크린 위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살아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배우 앙상블이 만드는 밀도황정민과 정우성. 이 두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 그건 절반짜리 이야기였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두 주역을 둘러싼 앙상블(ensemble), 즉 각자의 역할을 맡은 조연 배우들 전체가 만들어내는 집단적 밀도에서 나옵니다. 앙상블이란 개별 연기자의 합산이 아니라, 서로의 호흡이 맞물려 하나의 유기적 ..
주말 저녁에 야식까지 챙겨놓고 히어로 영화를 틀었는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당황한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치즈 감자튀김을 무릎에 올려놓고 원더우먼 1984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화끈한 액션을 기대했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걸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1984년이라는 배경, 단순한 시대 설정이 아니었다원더우먼 1984를 보기 전에는 "그냥 시대극 분위기 내려고 80년대로 간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직접 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1984년은 냉전(Cold War)이 정점에 가까워지던 시기였습니다. 냉전이란 미국과 소련이 직접 교전 없이 이념과 군비 경쟁으로 대립하던 국제적 긴장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화 ..
SNS 피드가 온통 한 영상으로 도배된 날이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조카가 숙부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한 영화 클립이었는데, 싱크로율이 어느 정도이기에 저렇게 난리인가 싶어 퇴근길에 곧장 집 앞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소란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자파르 잭슨, 핏줄이 증명한 무대 재현력영화 마이클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캐스팅이었습니다. 주인공 마이클 잭슨 역을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조카 자파르 잭슨이 맡는다는 소식이 공개됐을 때, 우려 섞인 시선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스크린 앞에 앉아보면 그 의문은 첫 번째 무대 장면에서 깔끔하게 사라집니다.자파르가 재현한 것은 단순한 춤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업계에서는 이런 연기를 퍼포먼스 마임(Performan..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히트맨 후속작인 줄 알고 클릭했습니다. 권상우 배우가 나온다길래 당연히 그 시리즈겠거니 했는데, 틀어보니 하트맨이더군요. 그런데 이게 웬걸, 문채원 배우까지 나오는 게 아닙니까. 예전부터 워낙 좋아했던 배우라 결국 정주행 했습니다.첫사랑 설정, 20년 만의 재회라는 공식첫사랑 재회 서사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이미 수십 번 반복된 내러티브(narrative)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구조 자체를 의미하는데, 장르적 공식이 강할수록 관객은 새로움보다 익숙한 감정을 소비하게 됩니다. 이 영화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20대에 엮일 뻔했다가 어긋난 두 사람이 중년에 다시 만난다는 설정은 솔직히 새롭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럼에도 제가 끝까지 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