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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1984 (80년대 배경, 인물, 영화의선택)

apple4049 2026. 6. 2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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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저녁에 야식까지 챙겨놓고 히어로 영화를 틀었는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당황한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치즈 감자튀김을 무릎에 올려놓고 원더우먼 1984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화끈한 액션을 기대했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걸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원더우먼 1984
    원더우먼 1984

    1984년이라는 배경, 단순한 시대 설정이 아니었다

    원더우먼 1984를 보기 전에는 "그냥 시대극 분위기 내려고 80년대로 간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직접 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1984년은 냉전(Cold War)이 정점에 가까워지던 시기였습니다. 냉전이란 미국과 소련이 직접 교전 없이 이념과 군비 경쟁으로 대립하던 국제적 긴장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화 후반부에 두 강대국이 서로를 향해 핵 버튼을 누르려는 장면은 그냥 배경이 아니라, 그 시대가 품고 있던 집단적 욕망과 공포를 정확히 불러내는 장치였습니다.

    1984년이라는 시대는 물질적 풍요와 과잉 소비가 폭발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영화 도입부의 쇼핑몰 장면은 화려한 색감과 인파로 가득한데, 그 안에서 다이애나 프린스가 슬며시 나타나 강도를 제압하고 사라지는 방식이 제게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갤 가돗은 이 장면에서 말 한마디 없이, 180cm에 가까운 체형과 절제된 눈빛만으로 장악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스라엘 군 복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크린 밖에서도 느껴지는 그 단단함이 캐릭터와 아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드림스톤은 고대 유물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 돌이 맥거핀(MacGuffin)의 역할을 합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만 그 자체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은 극적 장치를 의미합니다. 드림스톤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소원을 이루어주는지보다, 그 소원이 각 인물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에 집중하는 방식이 이 영화의 서사 전략입니다.

    욕망 서사 속 세 인물,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지다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의 빌런은 처음부터 악의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더우먼 1984에서 페드로 파스칼이 연기한 맥스웰 로드는 그와 거리가 멉니다. 그는 실패한 사업가로, 아들에게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설정이 오히려 더 불편했습니다. 공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맥스웰이 드림스톤 자체와 합일(合一)하는 장면은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측면에서 의미 있는 전환점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등장인물이 이야기 전반에 걸쳐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의미합니다. 맥스웰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다가 결국 아들의 존재로 인해 스스로 멈추는데, 이 흐름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 건 페드로 파스칼 특유의 능청스러우면서도 측은한 연기 덕분이었습니다.

    크리스틴 위그가 맡은 바바라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연구원이 치타로 변해가는 과정은 선망과 질투가 뒤섞인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저는 솔직히 바바라의 초반 모습에서 공감 포인트를 꽤 많이 느꼈습니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 건, 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동기 중 하나니까요.

    반면 다이애나의 경우는 다릅니다. 스티브 트레버를 되살리는 소원의 대가로 능력을 잃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와 직결됩니다. 힘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제 경험상 이 메시지가 가장 강하게 전달되는 건 다이애나가 스티브를 직접 보내주기로 결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대사 한 줄 없이 눈빛만으로 채운 그 몇 초가, 151분짜리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욕망으로 인해 치르는 대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이애나: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는 소원의 반작용으로 신적인 능력이 소멸
    • 맥스웰 로드: 타인의 소원을 무한히 들어주는 대신 생명력이 고갈
    • 바바라 미네르바: 원더우먼처럼 강해지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 상실

    액션 카타르시스 vs 감정 밀도, 이 영화의 진짜 선택

    원더우먼 1984에 대해 "후반부 액션이 너무 약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의도가 완전히 성공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3막 구조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3막을 설득과 감정으로 채웁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갈등의 발생, 심화, 해소로 이어지는 서사적 틀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관객이 액션 장르에 가지는 장르 문법(Genre Convention)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점입니다. 장르 문법이란 특정 장르가 관객과 암묵적으로 맺는 서사적 약속을 뜻하는데, 히어로 영화라면 적어도 마지막 전투에서 어느 정도의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지점이 이 영화의 가장 명확한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영화 비평 집계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의 관객 점수는 약 73%로, 같은 시리즈 전작인 원더우먼(2017)의 관객 점수 88%에 비해 낮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이 수치는 기대와 실제 경험의 간극을 꽤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DC 확장 유니버스(DC Extended Universe, DCEU)의 흥행 지표를 분석한 박스 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원더우먼 1984의 글로벌 수익은 1억 6천만 달러 수준으로, 전작의 약 8억 2천만 달러와 비교해 큰 차이를 보입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코로나19 시기 극장 개봉과 스트리밍 동시 공개라는 특수 상황이 영향을 미쳤지만, 평가 자체도 엇갈렸던 건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작품이 히어로 영화보다 우화(寓話)에 가깝다는 점이었습니다. 욕망이 어떻게 세상을 망가뜨리는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스펙터클보다 조용하고 깊은 쪽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에 공감하는 관객에게는 충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고,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긴 러닝타임이 더 길게 느껴지는 영화가 됩니다.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관객 유형을 솔직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화끈한 전투보다 캐릭터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는 서사를 선호하는 분
    • 갤 가돗, 페드로 파스칼의 연기를 좋아하는 분
    • DC 영화 시리즈를 순서대로 따라가고 있는 분
    • 80년대 미국 문화 특유의 과잉되고 화려한 비주얼이 취향인 분

    욕망과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히어로 장르 안에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지, 그 실험의 결과물로서 원더우먼 1984는 아쉬움과 미덕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저처럼 조용히 세상을 지키는 히어로 서사에 끌리는 분이라면, 기대치를 약간 조정하고 보시면 분명히 건질 것이 있습니다. 치즈 감자튀김을 곁들이는 건 여전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