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기대 없이 틀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게 된 영화였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늦은 오후, 창가에 스탠드 하나만 켜두고 웨이브를 열었는데 중반부터는 담요 끝자락을 꽉 쥐고 있는 제 손을 발견했습니다. 배성우의 6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끝장수사》, 뻔한 형사물 공식 안에서 얼마나 살아 있는 영화인지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배성우, 대사 없이도 다 말하는 배우배우에게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배우가 한 역할을 통해 굳혀온 고유한 이미지, 즉 스크린 안에서 반복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의 결을 뜻합니다. 배성우의 경우, '강력반 진돗개'라는 별명을 가진 형사 재혁이 그 페르소나를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파출소 창밖을 응시..
노년을 다룬 한국 영화는 신파가 기본값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은 그 공식을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세 노배우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눈물을 강요하는 대신 그냥 거기 있습니다. 그 존재감만으로 충분했습니다.세 배우가 쌓아온 세월 — 연기 경력이 곧 서사다일반적으로 노년 배우가 주연을 맡으면 "대가에 대한 예우" 정도로 소비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에서 나문희와 김영옥은 예우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이 영화를 직접 짊어지는 자리에 섰고, 그게 화면에서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나문희는 1941년생, 김영옥은 1937년생입니다. 두 배우는 스무 살 무렵부터 연기 인생을 함께해 온 사이로, 실제 친분이 수십 년에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역사 영화겠지"라고 얕잡아 봤습니다. 병자호란의 결말은 이미 아는데 뭐가 새롭겠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넷플릭스로 틀어놓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몸이 저도 모르게 더 움츠러들기 시작하면서,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 땀이 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실감했습니다.이병헌과 김윤석, 목소리를 낮출수록 커지는 긴장감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극적인 장면은 고함과 음악이 함께 치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과 김윤석이 연기한 김상헌이 마주 앉아 논쟁을 벌이는 장면들에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사 한 줄 한 줄..
솔직히 말하면 저는 스포츠 영화를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이 아닙니다. 패턴이 너무 뻔해서 중반부만 지나도 결말이 보이거든요. 그런데 주말 아침, 침대에 이불을 바짝 끌어당기고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큰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고, 어느 순간 스마트폰 카카오톡 알림을 전부 무음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리바운드, 그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해체 위기 농구부, 코치와 선수들의 면면영화의 배경은 부산중앙고 농구부입니다. 한때 전국을 호령하던 농구 명문이었지만, 지금은 해체 직전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군 복무 대신 모교에서 시간을 보내다 얼떨결에 지휘봉을 잡게 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코치 강양현입니다.안재홍이 연기한 강양현은 한때 잘 나가던 선수였지만 프로 무대에서 빛을 ..
개봉 2주 만에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8억 달러를 돌파한 영화가 있습니다. 온 동네 피드가 "아이 엠 스티브" 밈으로 도배되는 걸 보고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싶어서, 퇴근하자마자 모니터 앞에 주전부리를 늘어놓고 넷플릭스를 켰습니다.블록 세계관, 스크린 위에서 살아있다화면이 시작되자마자 숨이 막혔습니다. 산도, 나무도, 눈앞을 날아다니는 꿀벌까지 전부 직각의 블록으로 쪼개진 오버월드가 펼쳐졌는데, 제 방의 평범한 가구들과 그 대비가 너무 선명해서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CG(컴퓨터 생성 이미지)의 완성도입니다. CG란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나 물체를 화면 위에 구현하는 기법을 뜻합니다.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복셀(Voxel) 기..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부산행의 연장선으로 기대했습니다. 밀폐된 열차 안의 그 팽팽한 긴장감이 다시 올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거실 불을 끄고 홈시어터 스피커까지 켜두고 넷플릭스로 틀었더니, 전혀 다른 결의 영화가 나왔습니다. 기대와 달랐던 만큼 당황했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부산행 이후 4년, 반도는 어떤 세계관을 펼치는가반도는 2020년 7월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작품으로, 부산행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스탠드얼론 속편입니다. 스탠드얼론(standalone)이란 전작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계관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산행을 보지 않았더라도 반도 자체만으로 감상이 가능하고, 반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