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극장에서 캐러멜 팝콘을 손에 쥔 채 앉아 있다가, 박중훈이 근엄한 얼굴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쏟아내는 순간 팝콘 몇 알이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은 660년 황산벌 전투라는 무거운 역사 위에 사투리 앙상블이라는 전혀 다른 언어를 입혀, 교과서 속 이름들을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바꿔놓은 영화입니다.앙상블이 만든 전혀 다른 사극사극 코미디를 두고 "진지한 역사를 가볍게 소비한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황산벌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박중훈이 연기한 계백은 백제 최후의 명장으로, 삼국사기에도 실명이 기록된 실존 인물입니다. 여기서 삼국사기란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정사(正史)로, 삼국시대 인물과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야기인데, 끝까지 보고 나면 왜 둘 다 불쌍한 걸까요. 저는 평일 밤 11시에 혼자 이불 속에서 〈사도〉를 봤는데,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뿐입니다.배우 연기 —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했다〈사도〉를 보기 전, 주변에서는 "송강호가 영조를 너무 딱딱하게 연기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봤을 때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송강호는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보다 입을 다무는 순간에 훨씬 더 많은 걸 담아냈습니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그 얼굴을 따라가다 보면, 저도 모르게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2005년 개봉한 왕의 남자는 관객 1,230만 명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숫자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직접 극장에서 마주한 뒤로는 납득이 됐습니다. 단순히 볼거리가 풍성한 사극이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결이 살아 숨 쉬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연기력 — 대사 없이도 전달되는 것들콜라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걸 잊었습니다.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 방금까지 아이처럼 웃다가 다음 컷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일입니다.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 있던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고, 무릎 위 팝콘 통엔 그 이후로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이 장면에서 정진영이 구사한 것은 내면 연기(internal acting)에 가깝습니다. 내면 연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