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에 별로 기대가 없었습니다. 비버가 주인공이라는 설정도 그렇고, 소재 자체가 저의 관람 욕구를 끌어당기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극장을 나올 때는 생각보다 훨씬 행복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픽사가 또 한 번 해냈다는 생각이 든 작품, 지금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기대 없이 들어간 픽사의 서른 번째 도전
픽사는 최근 몇 년 동안 오리지널 IP(Intellectual Property), 즉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세계관과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내는 창작 방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대부분이 안정적인 흥행을 위해 검증된 시리즈의 속편이나 리부트에 집중하는 것과 대조적인 행보입니다. 엘리멘탈, 엘리오에 이어 이번 호퍼스까지, 픽사가 오리지널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다는 점은 산업적 관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결정입니다.
연출은 위 베어 베어스 더 무비의 다니엘 총 감독이 맡았습니다. 이 이름을 보는 순간 개인적으로 기대치가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위 베어 베어스 특유의 감성, 그러니까 유쾌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결이 호퍼스에도 스며들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예감은 절반쯤 맞았습니다.
호퍼스의 핵심 기술적 설정은 '호핑(Hopping)'입니다. 호핑이란 인간의 의식을 동물 로봇 신체로 전이시키는 기술로, 쉽게 말해 아바타처럼 다른 몸을 빌려 다른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입니다. 영화 스스로도 홍보 단계에서 아바타를 직접 언급했을 만큼, 이 설정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기에도 이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 그 설정을 어떻게 쓰느냐가 픽사의 진짜 실력이니까요.
호퍼스가 보여주는 동물 세계의 비주얼은 주토피아나 마다가스카와 비교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 유사성이 오히려 크게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픽사 특유의 렌더링(Rendering) 기술, 즉 빛과 재질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는 컴퓨터 그래픽 구현 방식이 동물 캐릭터들에게 입혀지니 귀여움의 밀도 자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만큼은 분명히 보장된 작품입니다.
비호감 주인공이라는 설계, 픽사의 자기 반성인가
호퍼스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부분은 주인공 메이블이라는 캐릭터입니다. 메이블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형적인 극단적 환경 활동가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공사 현장에 무단 침입하고, 환경 보호라는 명분 아래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인물입니다. 관객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주인공이라는 점이 꽤 파격적인 선택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메이블이라는 캐릭터가 과거 디즈니가 강하게 밀어붙였던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적 인물상과 겹쳐 보인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저는 그것이 의도된 자기 비판이라고 봅니다. PC주의란 성별, 인종, 환경 등 다양한 소수자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특정 가치를 콘텐츠에 적극 반영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간 디즈니가 세상을 향해 특정 가치를 주입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그 방식 자체의 한계를 스스로 꼬집는 구조를 택한 셈입니다.
영화는 메이블의 대척점에 비버 죠지를 세웁니다. 죠지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누구에게나 선한 면이 있다고 믿으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집스럽게 설파하는 캐릭터입니다. 분노와 신념으로 움직이는 메이블과 달리, 죠지는 공존이라는 가치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치가 있습니다. 메이블이 절대적 악으로 규정했던 제리 시장이 실은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공직자이며,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내러티브 반전(Narrative Subversion)'입니다. 내러티브 반전이란 관객이 기대하는 선악 구도를 의도적으로 뒤집어 익숙한 클리셰에 균열을 내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호퍼스는 주인공을 오히려 악에 가까운 자리에 배치하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메이블이 자신의 독선을 깨닫는 과정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 냈습니다.
호퍼스가 담아낸 성장 서사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분노 기반의 행동주의가 왜 공감을 얻지 못하는지를 주인공 스스로 보여줌
- 적이라 믿었던 존재와의 연대를 통해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함
- 목적이 아무리 숭고해도 과정이 타인을 해치면 진심은 닿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함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영화의 중심을 잡아 줍니다. 단순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이 메시지를 이렇게 포장해서 내놓은 것 자체가 픽사다운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여움이라는 무기, 그리고 픽사의 방향성
한 가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인 관객 입장에서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이라는 틀 안에서 서사를 전개하다 보니, 일부 전개가 어린 관객을 우선 고려한 방식으로 단순화된 느낌도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다니엘 총 감독 특유의 연출이 곳곳에서 살아 있습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언어로는 보기 드문, 약간의 섬뜩함과 기괴한 분위기가 순간순간 끼어드는 코미디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산업 전반의 흐름을 보면, 오리지널 IP의 흥행 리스크는 시리즈물 대비 훨씬 높습니다. 미국 박스오피스 분석 전문 매체의 집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의 흥행 상위권 대부분은 기존 IP의 속편이나 스핀오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이런 시장 환경 속에서도 픽사가 오리지널 작품을 계속 선보이는 것은, 단기 흥행보다 장기적인 브랜드 자산을 쌓겠다는 전략으로 읽힙니다.
실제로 픽사 오리지널 작품들의 장기 흥행 패턴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개봉 초기보다 스트리밍 전환 이후 누적 시청 시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콘텐츠 소비 트렌드 연구를 이어온 리서치 기관 Parrot Analytics의 보고서에 따르면, 픽사 오리지널 작품은 디즈니+ 공개 후 평균 시청 수요가 개봉 당시 대비 약 2~3배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출처: Parrot Analytics). 호퍼스 역시 극장 흥행 결과와 무관하게 스트리밍 단계에서 더 넓은 관객과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결국 호퍼스는 거창한 혁신보다는 픽사다운 감성과 자기 성찰이 조화롭게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디즈니가 나아가려는 방향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두 시간 남짓 극장 안에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그 귀여움과 따뜻함만으로도 극장에서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망설이고 계신다면, 기대치를 낮추고 가볍게 들어가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저처럼 예상보다 훨씬 좋은 기분으로 나올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