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터널스 (세계관, 거대서사, 영상미)

by apple4049 2026. 6. 22.

마블 영화라고 하면 으레 빠른 템포와 유쾌한 농담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주말 심야 상영을 일부러 골라 앉았는데, 화면이 열리는 순간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익숙한 마블의 문법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블 영화는 시종일관 에너지가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터널스》는 그 공식을 처음부터 거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터널스
이터널스

다국적 앙상블과 MCU 세계관 확장

《이터널스》의 출연진 구성은 마블 역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다채롭습니다. 세르시 역의 제마 챈, 이카리스 역의 리처드 매든, 테나 역의 앤젤리나 졸리, 에이잭 역의 셀마 헤이엑까지. 그리고 한국 관객이라면 마동석이 길가메시로 등장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좌석을 예약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한 국적 다양성을 넘어선다는 겁니다. 쿠무다리를 연기한 로런 리들로프는 실제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로, MCU 최초의 청각장애 히어로를 연기했습니다. 파스토스 역의 브라이언 타 이리 헨리는 MCU 최초의 동성애자 슈퍼히어로를 스크린에 올렸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마블이 단순한 흥행 공식보다 다양성 재현(Representation)을 진지하게 설계했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다양성 재현이란,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 집단을 콘텐츠 안에서 의미 있게 등장시켜 현실 세계의 다양한 관객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감독 클로이 자오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노매드랜드》로 이미 검증된 작가주의 감독입니다. 마블이 그녀에게 메가폰을 맡긴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지향점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실제로 MCU 작품들의 흥행과 감독 선택 경향을 살펴보면, 최근 마블은 장르적 실험에 점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IMDb).

이터널스 출연진의 핵심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마 챈 — 세르시 (리더, 물질 변환 능력)
  • 리처드 매든 — 이카리스 (최강 전사, 비행 및 에너지 광선)
  • 마동석 — 길가메시 (육체적 최강, 근접 전투)
  • 앤젤리나 졸리 — 테나 (냉혹한 전사)
  • 로런 리들로프 — 쿠무다리 (MCU 최초 청각장애 히어로)
  • 브라이언 타 이리 헨리 — 파스토스 (MCU 최초 동성애자 히어로)

셀레스티얼과 이머전스, 거대 서사의 명암

이야기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시작됩니다. 우주적 창조주급 존재인 셀레스티얼(Celestial) — 여기서 셀레스티얼이란 마블 세계관에서 우주의 탄생과 생명 창조를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로, 인간의 신 개념을 한참 뛰어넘는 규모의 존재입니다 — 이 10명의 이터널스를 지구로 파견하면서 서사가 시작됩니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핵심 반전은 이터널스가 수행해 온 임무의 본질입니다.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존재들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지구 내부에서 새로운 셀레스티얼이 탄생하는 이머전스(Emergence)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머전스란 행성 내부에 축적된 생명 에너지가 임계점에 달했을 때 새로운 셀레스티얼이 행성을 뚫고 탄생하는 과정인데, 이는 곧 지구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설정이 공개되는 순간,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이터널스 전체의 존재 이유를 뒤흔드는 구조적 충격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카리스와 세르시가 정반대의 선택 앞에 서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감정적 무게가 가장 무거운 대목입니다. 5천 년을 함께한 연인이 창조주의 명령과 인류 사이에서 갈라서는 장면인데,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에서 선악 구도는 명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카리스의 선택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쓸쓸하게 남았습니다.

세르시가 유니마인드(Uni-Mind)를 통해 티아무트를 잠재우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합니다. 유니마인드란 이터널스 개개인의 의식과 에너지를 하나로 집약하는 증폭 장치로, 이 순간만큼은 분열돼 있던 팀이 하나의 의지로 수렴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극장 스크린에서 이 장면을 직접 봤을 때, 사운드의 물리적 진동이 심장을 울리는 감각은 집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마블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터널스》는 기존 MCU 타임라인에서 가장 이른 시점인 기원전 5000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작품입니다(출처: Marvel Studios).

클로이 자오의 영상미, 그리고 아쉬운 밀도

이 영화를 두고 "마블답지 않다"는 평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말이 반드시 결점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자연광(Natural Light)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촬영 방식을 택했는데, 자연광 촬영이란 인공조명을 최소화하고 태양광과 환경광만을 광원으로 사용하는 기법으로, 화면에 회화적인 깊이와 따뜻한 질감을 부여합니다. 일몰빛 아래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스펙터클이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여운을 남겼는데, 제 경험상 마블 영화 중에서 이런 감각을 준 작품은 처음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0명이라는 방대한 캐릭터를 156분 안에 소화하다 보니, 각 인물의 감정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사건이 넘어가 버리는 서사적 피로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마동석이 연기한 길가메시가 퇴장한 이후, 후반부에서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졌던 건 아마 많은 한국 관객이 공감하는 지점일 겁니다. 길가메시의 타격음이 극장 공기를 흔들던 그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후반의 철학적 무게가 감정적 공백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의 완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색채 — 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클로이 자오의 손끝에서 나온 프레임들은 마블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단연 가장 회화적입니다. 셀레스티얼의 스케일이 현실 위에 덧입혀지는 장면들은 극장에서 봐야 그 압도감이 제대로 전달됩니다. 제가 심야 시간대 상영을 일부러 고른 이유도 바로 그 순간들 때문이었고, 그 선택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터널스》는 MCU가 단순한 히어로들의 싸움을 넘어 존재론적 질문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 을 본격적으로 꺼내든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전환점입니다. 아름다운 화면과 철학적 주제 의식이 감정의 밀도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 딜레마가 이 영화의 한계이자 동시에 기억에 남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블의 다음 시도가 어떤 방향으로 이 질문을 이어갈지, 개인적으로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