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피드를 넘기다가 별 기대 없이 눌러봤는데 두 시간 넘게 화면에서 눈을 못 뗀 경험, 한 번쯤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가 딱 그랬습니다. 해피엔딩인 듯 보이지만 막상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이상한 영화입니다.

평범한 가장의 몰락,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25년 근속 기술자 유만수(이병헌)가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는다는 설정은, 솔직히 처음엔 너무 흔한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예상과 달리 영화는 드라마틱한 해고 장면보다 그 이후의 일상을 더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마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면접장을 오가는 만수의 표정이 무너지는 과정은, 직장인이라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 더 불편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입니다. 여기서 원작 소설이 쓰인 맥락을 짚을 필요가 있는데, 1997년 출간 당시 미국 경제의 다운사이징(downsizing) 물결이 배경입니다. 다운사이징이란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을 대규모로 감축하는 구조조정 방식을 뜻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구조를 한국 사회에 이식하면서 자동화와 AI 대체라는 2020년대 현실을 덧입혔습니다.
실제로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 분야 직무의 상당수가 자동화 고위험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됩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영화 속 제지 공장이 텅 빈 상태로 묘사되는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코끝이 찡해진 건, 스크린 속 이야기가 어디선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어두워지는 지점은 만수가 살인을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중요한 건 그 첫 번째 살인의 질감인데, 계획적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린 사람이 내리는 선택처럼 연출됩니다. 일반적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살인자는 처음부터 냉혹하게 그려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에서 만수는 다릅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나무와 분재, 영화가 숨긴 상징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무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미장센(mise-en-scène)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영화에서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소품, 조명, 배우의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설계하는 개념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나무라는 이미지에 여러 겹의 의미를 쌓아 올립니다.
나무 → 종이 → 폐지로 이어지는 순환은, 사람이 조직에서 쓰이다가 버려지는 과정과 겹칩니다. 만수의 집 마당에 등장하는 분재가 특히 섬뜩합니다. 분재(盆栽)란 화분 안에서 나무를 철사로 묶고 원하는 방향으로 인위적으로 형태를 잡아 키우는 방식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억지로 꺾어놓는다는 점에서, 만수가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가는 행위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영화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무와 분재: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고 통제되는 노동자를 상징
- 텅 빈 공장: 인간 노동이 자동화로 대체된 현실을 시각화
- 이 빠지는 마지막 장면: 만수의 마지막 남은 도덕성이 사라졌다는 선언
- 아내 미리의 침묵: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조용한 공모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가 스스로 이를 뽑는 행위에 대해, 양심의 소멸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습니다. 이빨은 생존 본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이빨을 스스로 뽑아버렸다는 건, 기계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본능적인 저항력마저 포기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제 경험상 이런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장면일수록 감독이 의도적으로 열어둔 공백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
아내 미리(손예진)가 끝내 남편에게 묻지 않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침묵을 선택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에서 아내의 침묵은 헌신이나 사랑으로 해석되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미리의 침묵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집니다.
그녀의 선택은 사랑이 아니라 유지입니다. 가족, 집, 아이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고, 그 결과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이 구조를 묵인한 공모자가 됩니다. 딸 유리원의 첼로 연주가 마침내 끝까지 이어지는 장면은 표면상 회복처럼 보이지만, 그 음악이 무엇 위에 세워졌는지를 아는 관객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수는 그 연주를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서사 구조는 내러티브 아이러니(narrative irony)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내러티브 아이러니란 이야기의 표면적 결과와 그 이면의 의미가 정반대로 작동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만수는 취업에 성공하고 집을 지켰지만, 그가 도착한 자리는 이미 사람이 필요 없는 자동화 공장이었습니다. 성공이라는 형식 안에 실패의 본질이 담겨 있는 구조입니다.
영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이 결말의 해석은 엇갈립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은 일관되게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는 열린 결말을 선호해 온 것으로 분석됩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실제로 〈어쩔 수가 없다〉는 관객이 스스로 답을 내려야 하는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진짜 면죄부가 될 수 있는지, 그 질문은 엔딩 이후에도 오래 남습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밤바람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감각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 영화였으니까요.
〈어쩔 수가 없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 보고 나면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며칠은 따라다닐 것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다 보고 나서 가족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할 말이 많아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