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영화에서 마른 체구의 배우가 장군을 맡으면 어울릴까요? 솔직히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결혼 후 오랜만에 와이프와 주말 저녁 극장을 찾으면서도, 과연 이 선택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지자, 그 걱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조인성 캐스팅, 정말 우려할 일이었을까
영화를 보기 전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조인성의 캐스팅이었습니다. 장군 역할이라면 묵직한 카리스마와 체격이 받쳐줘야 한다는 게 제 고정관념이었거든요. 명량에서 최민식이 보여준 이순신처럼, 근엄하고 무게감 있는 장수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양만춘은 그런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의 다툼을 직접 말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안아주러 가는 성주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에 가까운 인물인데, 여기서 서번트 리더십이란 권위로 군림하는 대신 구성원 곁에서 함께 움직이며 신뢰를 쌓는 리더십 방식을 뜻합니다. 이 스타일을 조인성의 가벼운 분위기와 훤칠한 외형이 오히려 잘 소화해 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역할과 배우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남주혁이 연기한 사물이라는 허구 인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시성 출신이지만 연개소문의 명을 받아 양만춘을 제거하러 온 인물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캐릭터를 영화 문법에서는 포컬라이저(focalizer)라고 부릅니다. 포컬라이저란 이야기 속 사건을 특정 인물의 시각으로 독자 혹은 관객에게 전달하는 서술 장치인데, 사물이 바로 그 역할을 맡아 양만춘이라는 인물을 관객 눈높이에서 자연스럽게 조명해 줍니다.
공성전 연출, 한국 영화의 수준을 다시 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단연 공성전(攻城戰) 장면들입니다. 공성전이란 성벽을 사이에 두고 공격군과 수비군이 벌이는 전투 방식으로, 투석기, 공성탑, 토산 등 다양한 공성 병기가 동원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화에는 크게 세 차례 전투가 등장합니다.
- 1차 전투: 투석기를 앞세운 당나라군의 공격과 양만춘의 백병전 전술로 격퇴
- 2차 전투: 연기로 본진을 가린 뒤 등장한 공성탑 기습, 기름주머니와 화살로 불태워 승리
- 3차 전투: 안시성 높이에 맞먹는 토산 완공에 맞서 땅굴을 파 무너뜨리는 전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성전을 CG(컴퓨터 생성 이미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CG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실제로 촬영하기 어려운 장면을 시각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끝이 보이지 않는 당나라 대군과 불타는 공성탑 장면은 그 기술 수준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와이프와 저는 팝콘을 먹는 것도 잊은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전투가 반복되는 구조임에도 당나라의 공격 방식이 매번 달라지고, 양만춘의 대응 전술도 달라지기 때문에 지루함이 없었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통계에 따르면 안시성은 2018년 한국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몇 안 되는 대작 중 하나였는데, 이 전투 연출이 그 흥행의 핵심 동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스토리의 아쉬움, 이 영화의 한계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 완벽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시각적 쾌감은 확실히 일급이지만,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에서는 뚜렷한 균열이 보입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의 배열과 인과관계를 뜻하는데,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구조가 느슨해집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기마병 수장 파소와 그의 연인 백하의 에피소드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긴장감을 높이려는 의도가 분명한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습니다. 설현이 연기한 백하의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히 비극으로 치닫다 보니, 관객이 슬픔을 느끼기보다 전개가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눈을 맞추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 이세민이 한쪽 눈에 이상이 있었다는 기술이 있기는 합니다.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에도 관련 서술이 남아 있는데, 영화는 이를 양만춘이 활로 직접 맞혔다는 설로 극적으로 풀어냅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영화적 허용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도 당기지 못하던 활을 순간 당겨 정확히 눈을 맞힌다는 설정은 판타지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서사 밀도(narrative dens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이야기 안에서 각 장면이 전체 주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인데, 이 영화는 전투 장면의 서사 밀도는 높지만 인물 감정선의 밀도는 낮습니다. 그 불균형이 전체 완성도를 조금 갉아먹는 느낌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와이프와 영화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눴습니다. 사극에 큰 흥미가 없던 와이프조차 "전투 장면은 진짜 대단했다"라고 했을 만큼, 이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는 분명히 인정할 만합니다. 다만 깊이 있는 역사 드라마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다면 조금 다른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스토리보다 압도적인 전투 연출에 집중하며 보시길 권합니다. 그 기대치로 가면 분명히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