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에 뭔가 거창한 걸 보고 싶은데 머리는 쓰기 싫을 때, 딱 맞는 영화가 있습니다. 2018년 개봉한 아쿠아맨이 그랬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이게 이렇게까지 볼만한 영화였나?"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스토리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눈이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 선 영웅, 배경과 등장인물
아쿠아맨은 DC 확장 유니버스(DCEU), 즉 DC 코믹스의 세계관을 영화로 구현한 시리즈의 일환입니다. 여기서 DCEU란 마블의 MCU처럼 여러 히어로 영화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프랜차이즈 구조를 말합니다. 아쿠아맨은 그 안에서도 바닷속을 주요 무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차별화된 포지션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아서 카레 역을 맡은 제이슨 모모아는 190cm를 훌쩍 넘는 체구에 문신으로 뒤덮인 외모만으로도 등장과 동시에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기존 DC 히어로들이 다소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면, 그의 아쿠아맨은 거칠고 유머러스한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캐스팅이 과연 맞는 선택인가 의구심이 있었는데, 막상 보니 오히려 그 즉흥적인 에너지가 영화 전체의 톤을 살리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메라 역의 앰버 허드는 단순히 히어로 옆을 지키는 조력자가 아니라, 때로는 아서보다 더 냉철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극을 이끌어 나갑니다. 빌런 옴 역의 패트릭 윌슨도 단순한 악당이 아닌, 자신만의 신념과 논리를 갖춘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은 생각보다 세심한 편입니다.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서 카레(제이슨 모모아): 지상과 해저 두 세계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혼혈 히어로
- 메라(앰버 허드): 아틀란티스 출신의 강인한 여전사, 삼지창 탐색의 동반자
- 옴(패트릭 윌슨): 지상 세계의 환경오염에 분노한 아틀란티스의 왕, 논리 있는 빌런
- 아틀라나(니콜 키드먼): 아서의 어머니, 짧은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
스토리 구조보다 미장센이 앞선 영화
줄거리의 큰 틀은 솔직히 예측 가능합니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이 전설의 무기를 찾아 여정을 떠나고, 결국 왕으로 인정받는다는 구조는 영웅 서사의 전형적인 공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런 서사 구조를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내러티브 아크란 주인공이 갈등을 거쳐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말합니다. 아쿠아맨의 아크는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 심리적 깊이가 충분히 쌓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영화 속 핵심 갈등인 지상과 해저의 충돌은 흥미로운 환경적 은유를 품고 있습니다. 옴이 지상 침공을 선언하는 명분이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해양 오염에 대한 분노라는 점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해양 오염 문제는 심각한 수준인데, 유엔환경계획(UNEP)에 따르면 매년 약 800만 톤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고 있습니다(출처: 유엔환경계획(UNEP)). 옴의 분노가 단순한 픽션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시각적 성취 면에서는 이 영화가 압도적입니다. 제임스 완 감독은 수중 미장센(mise-en-scène)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색채,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연출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극장 명당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마주했을 때, 네온빛 원색으로 가득 찬 해저 왕국이 시야를 꽉 채우는 그 순간만큼은 "이건 정말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여러 해저 종족이 한꺼번에 뒤엉켜 싸우는 대전투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입니다. 사운드 디자인(sound design), 즉 영화에서 효과음, 음악, 환경음을 설계하고 배치하는 작업이 탁월하게 구현된 장면이기도 합니다. 제이슨 모모아의 타격음과 파도 소리가 물리적인 진동으로 느껴질 만큼 극장 스피커를 뒤흔들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스토리의 허술함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아쿠아맨, 어떤 관객에게 맞는 영화인가
영화를 평가할 때 "스토리가 약하다"는 비판과 "비주얼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이 공존합니다. 저는 솔직히 두 시각 모두 맞다고 봅니다. 이 영화는 캐릭터들이 마주하는 정체성의 혼란이나 형제간의 갈등을 더 밀도 있게 다루었더라면 비주얼과 서사를 동시에 잡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VFX Award)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출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기술적 성취만큼은 업계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드라마적 몰입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초반부 아서의 어딘가 삐뚤어진 태도,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묻어나는 장면들은 분명히 감정선이 있습니다. 다만 중반부 삼지창 탐색 과정에서 그 흐름이 다소 분산되는 느낌이 들었던 건 제 솔직한 경험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꺼내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도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화려한 CG가 만들어낸 해저 세계는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극장에서 놓쳤다면, 대형 화면과 좋은 스피커 환경에서 보는 걸 권합니다.
아쿠아맨을 어떻게 즐길지 고민이라면, 다음 기준으로 판단해 보시면 됩니다.
- 스펙터클한 시각적 경험을 원하는 관객: 강력 추천
- 탄탄한 드라마와 심리적 갈등을 기대하는 관객: 기대치를 낮추고 볼 것
- 아이와 함께 가족 영화를 찾는 관객: 충분히 만족스러운 선택
결국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 '보는 재미'로 승부하는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서사적 깊이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지만, 극장 좌석을 꽉 채우는 시각적 압도감만큼은 다른 히어로 영화에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스트리밍으로 처음 보더라도, 한 번 본 뒤 "그 대전투 장면은 역시 극장이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드실 거라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