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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가까이 치킨을 시켜놓고 뭔가 볼 영화를 찾다가 고른 게 〈소주전쟁〉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가볍게 넘길 뻔했는데, 화면에 '1997'이라는 숫자가 뜨는 순간 닭다리를 뜯던 손이 멈췄습니다. 그 시절 IMF 외환위기를 온몸으로 통과한 직장인의 이야기, 그리고 자본과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남자의 거리감. 보고 나서도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1997년 IMF, 화면 속 그 시절이 낯설지 않은 이유
영화의 배경은 1997년 IMF 외환위기(International Monetary Fund Crisis)입니다. 여기서 IMF 외환위기란 국가 전체가 외채를 갚지 못할 위기에 처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사태를 가리키며, 수많은 기업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이어진 시기였습니다. 국보소주 역시 그 파도 아래 자금난에 허덕이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때 어려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거실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던 부모님의 뒷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영화 속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의 발걸음,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장면들이 그 기억과 겹쳐 보이자, 제가 그냥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그 시절을 되짚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1997년 말 기업 부도 건수는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급증했고, 실업자 수는 1998년 한 해에만 약 150만 명이 늘어났습니다(출처: 한국은행). 영화는 이 숫자들을 직접 읊지 않습니다. 대신 책상 위에 쌓여가는 서류 더미와 자재 창고를 비추는 카메라가, 그 숫자들이 실제로 어떤 표정으로 살아 있었는지를 대신 말해줍니다.
제가 직접 두 시간 넘게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역사 교과서를 재현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몸으로 겪은 사람들의 체온을 스크린 위에 얹으려 한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자재 창고 장면에서 괜히 냉장고 속 맥주 캔 개수를 헤아려봤던 건, 아마 그 체온이 저한테도 닿았다는 증거였을 겁니다.
- 배경: 1997년 IMF 외환위기, 전국적 기업 부도와 대규모 실직 사태가 맞물린 시기
- 극 중 국보소주는 자금난으로 흔들리며 외부 자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처지에 몰림
- 시대 재현은 설명 대신 인물의 표정과 공간의 변화로 전달되는 방식
유해진 연기 하나로 두 시간이 버텨지는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코믹한 역할로만 익숙하게 봐온 터라, 처음엔 그냥 '든든한 조력자 캐릭터겠거니' 하고 켰습니다. 그런데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 하나로 그날의 심경을 짐작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씹던 걸 삼키는 것도 잊었습니다.
표종록은 내러티브(narrative), 즉 서사 구조상 전형적인 구세대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유해진은 그 인물을 전형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손짓 하나, 회의실에서 서류를 내려놓는 타이밍 하나로 수십 년 직장 생활의 무게를 그 안에 쌓아 올립니다. 눈물 신 없이도 마음을 붙드는 연기란 이런 걸 말하는 것 같다고,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이제훈이 연기하는 최인범은 레버리지 바이아웃(LBO), 즉 차입 인수 방식으로 대상 기업을 집어삼키는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인물입니다. LBO란 인수 대금의 상당 부분을 외부 차입으로 조달한 뒤 인수 후 대상 기업의 자산이나 현금흐름으로 상환하는 인수합병 기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남의 집을 담보 잡아 그 집을 사들이는 방식입니다. 인범이라는 인물이 냉혹해 보이는 배경에는 이 구조 자체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두 배우가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말을 아끼는 장면에서,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이 오히려 대사가 넘치는 장면보다 훨씬 오래 남습니다. 본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인범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보는 동안, 손에 쥔 닭다리가 반쯤 뜯긴 채 식어가는 것도 몰랐으니까요. 인범이 서명 직전에 손끝을 멈추는 그 정지 하나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인범이라는 인물의 내적 균열이 표정과 정지된 손끝만으로 처리되다 보니, 그가 자신이 몸담은 세계와 결별하기까지의 내면 갈등이 충분히 파고들어 진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갈등을 조금 더 밀도 있게 보여줬더라면, 종록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묵직한 무게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쉽게 남는 대목입니다.
인수합병 영화로 보면 심심하고, 사람 영화로 보면 오래 남는 이유
협상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서류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전쟁'이라는 제목이 예고한 날 선 대립에 비하면 후반부 갈등의 온도는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는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갑니다. 날카로운 대결 구도로 끝까지 가거나, 아니면 사람 사이의 온도 변화 자체를 결말로 삼거나. 〈소주전쟁〉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인수합병(M&A, Mergers and Acquisitions)이라는 소재는 자칫 수치와 법률 용어의 나열로 흐르기 쉽습니다. M&A란 기업의 경영권 확보를 목적으로 다른 기업을 매수하거나 합병하는 거래를 뜻하며, 협상 과정에서 실사(due diligence), 즉 인수 대상 기업의 재무·법률·운영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영화는 이 복잡한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협상 테이블 위의 인간관계에 집중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0년대 이후 국내 개봉 기업 드라마 장르 영화의 관객 만족도는 '인간관계 묘사'가 높을수록 장기 입소문 지수가 높게 나타났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소주전쟁〉이 선택한 방향이 상업적으로도 나쁜 선택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조연진의 역할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손현주가 연기하는 재벌 2세 석진우는 회사의 위기 앞에서도 자기 몫만 계산하며 움직이고, 최영준의 법무법인 대표는 자본의 논리를 가장 차갑게 대변합니다. 이 두 인물이 종록을 조직 안에서 고립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덕분에, 주연 두 사람의 서사가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조연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욕망을 또렷하게 새겨 넣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공기가 지금보다 훨씬 얇아졌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 오락적 쾌감보다 인간 관계의 온도 변화를 결말로 삼는 구조
- M&A·LBO 같은 자본 논리를 배경으로 깔되, 전면에는 두 남자의 신뢰와 균열을 배치
- 조연진이 각자의 욕망을 선명하게 새겨넣어 주연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받쳐주는 구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즈음에야 두 시간 넘게 자세 한 번 안 바꾸고 앉아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식탁 위 남은 닭다리 하나가 그 밤의 몰입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반전이나 시원한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면 다소 아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을 몸으로 통과한 사람, 혹은 그 시절 어른들의 표정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화면 곳곳에서 잊고 지냈던 감정이 툭툭 건드려질 겁니다.
보고 나서 유해진의 다른 필모그래피를 다시 들춰보고 싶어 졌다면, 이 영화가 제 역할을 한 겁니다. 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있으니, 치킨이나 안주 하나 옆에 두고 자정쯤 켜보시길 권합니다. 단, 안주가 식어도 신경 쓰지 않을 각오는 미리 하시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