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봉준호 감독 작품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봐왔다고 자부했는데 <설국열차>만큼은 개봉 당시 놓치고 뒤늦게 챙겨봤습니다. 그러면서 "이걸 왜 이제 봤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했고, 와이프와 영화가 끝난 뒤 한참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와이프도 저와 똑같은 감상이었다고 하더군요.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오래 머릿속을 맴도는 경험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계급사회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그린 발상
계급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대부분의 작품은 계급 구조를 수직으로 묘사합니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를 지배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일반적이죠. 그런데 <설국열차>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은 바로 이 계급사회를 수평 구조, 즉 기차의 앞칸과 꼬리칸으로 나눠 표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수평적 계급 구조는 단순한 연출 선택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높은 계급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계급 상승이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요구하는지를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꼬리칸 사람들이 먹는 것은 단백질 바(Protein Bar)인데, 이것이 바퀴벌레를 압축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봤을 때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여기서 단백질 바란 영양소를 압축 가공한 식량 대체재를 말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피지배 계급의 삶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영화 용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한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소품, 조명, 인물 배치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칸칸이 이동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미장센으로 구현해냈습니다. 저 역시 칸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등장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동시에 납득이 잘 안 되는 요소들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수족관 칸이 나오고 아이들을 세뇌시키는 교실 칸이 나오는 장면들은 판타지적 설정이 너무 앞선다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도 폐쇄적인 아파트 공간 안에서 계급 풍자를 다뤘는데, <설국열차>는 그 구조를 기차라는 훨씬 더 극단적인 공간으로 가져와 직접적으로 펼쳐냈습니다. 이를 공간적 알레고리(Spatial Allegory)라고 부를 수 있는데, 공간적 알레고리란 물리적 공간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반란은 계획된 것이었다, 그 구조의 충격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정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액션 장면이 멋져서가 아니었습니다. 꼬리칸에서 엔진칸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긴장감도 컸지만,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반란의 실체 때문이었습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이끄는 반란이 사실 월포드가 설계한 시스템의 일부였다는 반전은, 체제 안에서의 개혁이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묻는 질문이 선명해집니다. "당신은 체제 안에서의 개혁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체제 자체를 뒤엎을 것인가."
이러한 구조는 헤게모니(Hegemony) 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헤게모니란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한 개념으로, 지배 계급이 물리적 강제가 아닌 문화·이념적 동의를 통해 피지배 계급의 복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을 말합니다. 월포드가 반란을 예견하고 심지어 활용했다는 설정은 이 개념의 영화적 구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계급 문제를 단순한 선악 구도로 그리지 않고 이렇게 복잡한 층위로 다뤘다는 점이 이 작품의 진짜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초반부의 강렬한 도끼 혈투 이후 중반부에서 다소 지루함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칸을 이동할 때마다 세계관이 급격히 바뀌는 탓에 몰입이 끊기는 구간이 있었고, 일부 설정은 개연성보다 상징성을 너무 앞세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중간 정도의 완성도로 평가하는데, 재미있는 요소와 억지스러운 부분이 공존하는 작품이라는 것이 솔직한 감상입니다.
영화의 계급 묘사 방식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꼬리칸: 무임승차자들,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바 배급, 상시 무장 경비 통제
- 중간칸: 기차 운영 인력(청소, 경비 등), 중간 계급적 역할 수행
- 앞칸: 부유층, 최고급 음식과 향락, 시스템 유지의 수혜자
- 엔진칸: 월포드, 기차 자체를 설계하고 지배하는 절대 권력
봉준호 감독이 던지는 질문과 캐스팅의 힘
이 영화가 2013년에 개봉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당시 기준으로 할리우드 배우들과 한국 감독이 이 규모로 작업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도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깜짝 놀란 이유 중 하나가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존 허트, 에드 해리스 같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었거든요.
특히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독보적이었습니다. 총리 메이슨이라는 캐릭터는 희극적이면서도 섬뜩한데,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전히 소화해냈습니다. 에드 해리스가 마지막에 등장해 커티스를 설득하는 장면에서는 <트루먼 쇼>의 그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했습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인물로서 에드 해리스가 또 다른 주인공을 설득하는 구조가 묘하게 겹쳤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맥거핀(MacGuffin)을 적극 활용합니다. 맥거핀이란 서사를 추동하는 표면적 목표물로, 실제로는 그 이면의 메시지가 진짜 주제인 경우를 말합니다. 꼬리칸 사람들이 엔진칸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자체가 맥거핀으로 기능하며, 관객은 그 과정에서 계급 구조의 실체를 하나씩 목격하게 됩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설국열차>는 국내 관객 935만 명을 동원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대중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잡은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하면, 이 기록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증거가 됩니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계급 비판 시선을 가장 직접적이고 물리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처럼 뒤늦게 보신 분이라면 조금 억지스러운 장면에서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왓차에서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으니, 속편처럼 제작된 드라마 시리즈를 보기 전에 원작 영화를 먼저 챙겨보시길 권합니다.